노래로 자신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면 커트 코베인의 (Come as you are)는 그의 자화상일 것이다. “네 모습 그대로 와, 너였던 모습으로, 내가 원하는 너의 모습으로, 친구의 모습으로, 적의 모습으로.”(Come as you are, as you were, as I want you to be, as a friend, as an old enemy) 20대 후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나는 좁은 방을 가득 메우던 중독성 강한 기타 리프에 몸을 맡기면서도 가사만은 믿기지 않았다. 친구로, 적으로, 네 모습 그대로 오라니 도무지 무슨 말인가. 잊고 있었는데 (홍은전 외 지음, 온다프레스 펴냄)를 간신히 다 읽고 나니 오래전에 맺혔던 의문이 다소 풀린다.
나 아닌 거로 사랑받기보다 나로서 미움받겠다책 속 화자들은 모두 몸에 불이 붙어 죽을 뻔했던 화상을 겪(었)는데 대부분 생사를 넘나드는, 거듭되는 수술을 거쳐 지금 몸(의 일부)을 간신히 건졌다. 화상 이후 그들은 자주 타인이 보내는 ‘슬픔의 위안’을 받아왔다. 그러다보니 바란 건 아니었지만 자기 앞에 마주한 사람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생겼다. 화상으로 잘려나간 남자의 외팔을 보고 어린아이가 “아저씨, 왜 팔이 없어요?”라고 물으면 아저씨는 안다. 아이는 팔 없는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라 만화 속에서나 보았던 인물을 실제 마주하니 신기해 그런다는 걸. 반면 지긋한 어른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을 보며 “아직 젊은데 어쩌다가…” 혀를 차며 안쓰러워하거나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면 여자는 안다. 멋대로 가엾이 여기고 있음을.
네 모습 그대로 오라는 무얼 덧대지 말고 가진 것 그대로 오라는 일종의 권고인데, 당신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친구로 오든 적으로 오든 상관없겠다는 선언이다. 다만 친구가 아니면서 친구인 척, 사실은 적이면서 친구인 척 위장하고 오지는 말라는 것이다.
커트 코베인은 더는 대중의 환호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유서에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당신들을, 당신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다. 당신들에게든 나에게든 그건 공정하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나쁜 죄악은 내가 100% 즐거운 것처럼 꾸미고 가장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내가 아닌 것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차라리 나로서 미움받겠다.”(I’d rather be hated for who I am, than loved for who I am not)고도 했다.
스물일곱으로 자기 생을 접어버린 커트 코베인, 그가 생전에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스물다섯을 끝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그녀가 지새웠을 까만 밤을 가늠해본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건 나 아닌 것으로 사랑받기보다 나로서 미움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야? 따위의 추궁도 지겹지만,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을까. 즐거운 척 가장할 마음이 없고 어떤 위로로도 새살이 돋아나지 않는 노곤하기만 한 밤… 그런 어둠과 인간이 어떻게 다투나.
친구도, 적도 없는 그곳에서타자(他者)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강조해온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는 우리에게 궁극적 요구를 하고,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성으로써 응답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몸의 고통은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먼저 느끼고, 사회적 고통은 대개 약자가 감당하거나 대속(代贖)한다. 그녀가 화염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이(승)편에 있는 우리에게 요청한 변화와 응답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쯤 다시금 쏟아지는 ‘핫’한 뉴스들에 덮여 그녀는 금세 과거가 돼버렸을까. 더는 친구도, 적도 없는 그곳에서 설리, 부디 꿈도 없는 영면에 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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