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휩쓸던 제주바다는 황색 파도였다. 태풍이 떠나간 제주바다는 여전히 짙푸르다. 이 바다에서 이 냄새를 자유롭게 맡을 수 없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 깊은 냄새라니! 재독 ‘경계인’ 송두율 교수 부부가 고향 제주바다에 맨발을 적신 때는 2004년이다. 2003년 37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던 그에게 느닷없이 씌워진 국가보안법 위반, 그 광풍 속에 감금됐다가 무죄로 풀려나와 처음 찾은 성산일출봉 광치기해변에서 나온 그의 탄성이다. 먼 데서 영혼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그 검푸른 바다였다. 유럽과 달리 짙은 냄새에 혹하고, 이끼가 낀 배경의 풍광에 혹한다는 모습을, 그를 다룬 다큐 (홍형숙 감독, 2009)에서 만난다. 수십 년 만에 찾은 조국에서 육신이 상했던 그를 고향 바다가 조금은 위로해줬을까. 생각했다. 폭압의 시대, 저 수평선이 한때는 자유롭게 건너올 수 없던 국경이던 사람들을.
제주도, 삶과 죽음의 경계제주도. 지금은 시대의 찬란을 조금은 누리고 있지만 파란만장 참혹한 역사가 바다로 흘렀고, 서럽고 슬픈 이야기들이 안개 속 무가처럼 떠다닌 결절의 섬이었다. 지정학적 운명 탓에 온몸으로 폭풍을 맞던 섬. 해서 해방 공간 한반도의 모순이 집약된 땅이었다. 제주인의 삶의 뿌리엔 그러한 유전인자들이 실핏줄로 뒤엉켜 있다. 그것들의 실체를 나는 깊이 경험하진 못하였으나 그 솜털 같은 후예로서 조금은 느껴볼 수 있는 세대에 속하리.
제주말에 ‘트멍’이라는 말이 있다. ‘틈새’를 말한다. 이쪽과 저쪽의 틈, 제주 사람 가운데는 바다를 떠나 틈새에 사는 경계인이 많다. 해안선 5킬로미터는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했으며, 해안선은 삶의 경계로 가는 것이기도 했다. 재일 경계인 김시종 시인처럼. 재일 디아스포라는 일본 땅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주4·3 유엔 인권 심포지엄에서 만난 4·3 유족 또한 그러했다. 국가폭력 앞에서 인권이란 이름조차 없었던 시대, 한 치 앞을 모르는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어린 눈동자들이 거기 엄연히 있었다.
4·3 당시 두 살배기였던 딸은 일흔둘. 일본 오사카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4·3 시기 억울하게 붙잡혔고, 대구형무소에서 행방불명. 스물한 살 어머니는 온갖 고문을 당해 온몸이 시커멓게 변했었다고 눈을 닦았다. 소년기에 어머니, 형님 두 분, 누나를 잃고 거의 홀로 삶을 헤쳐나가야 했다는 80대 아들의 가슴은 여전히 이쪽도 저쪽도 흔들리는 마음의 경계에 있었다. “고향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4·3으로 이렇게 먼 곳까지 나와 있어요.” 4·3의 깊은 기억으로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못 견디게 고향 바다를 그리워했다.
나는 지난 찬란한 계절에 폭풍우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여 ‘노 땡큐!’의 마무리 글을 쓰지 못했다. 불쑥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래도 될까 자문하면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는 제주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제주 이야기로 인사하고 있다.
오래 울었으니 오래 웃자태풍의 길목처럼, 여전히 많은 도전과 갈등을 빚는 제주섬이다. 나는 제주도가 경계를 넘는 땅이라고 생각한다. 인권을 유린당한 상처를 입은 만큼 진혼이 필요한 땅이자,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 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도 그러듯이. 오래 울었으면 오래 웃어야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돌아보니 행복한 이야기보다 서러운 이야기를 많이 썼다. 부실한 글을 읽어주셨던 ‘노 땡큐!’ 독자분들과 지면을 주신 에 늦은 감사를 올린다.
제주말 트멍은 ‘쉼, 쉼표’를 말하기도 한다. 이 가을 트멍을 내 제주에 오신다면 제주바다에서 그토록 자유롭게 고향의 찬란함을 거닐고 싶었던 한 재독 경계인의 마음도 느끼시라. 또한 그 바다에서 처절하게 사라진 아픈 4·3의 영혼들과 아직도 먼 땅에서 그 고향 바다를 그리워하며 우는 사람들의 비애에도 눈을 주시라.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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