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만드는 PD들이나 작가들의 입장에서 ‘아무리 비판해도 항의하지 않는’ 정치인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이니 생각나는 대로 ‘밟아버리기 쉽고’ 국민들로부터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직업군이니 마음껏 비판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중략) 현실 정치인들이 전혀 공감할 수도 없고, 그런 일이 있을 법하다는 그 어떤 유사점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을 설정해놓고 상갓집 개 옆구리 걷어차듯 지나가다 심심하면 걷어차서야 당사자들로부터는 반감을 살 뿐이고 시청자들에게는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정치 혐오증을 증폭시킬 뿐이다.”
정치 혐오가 반영된 ‘상갓집 개’
글쓴이는 왜 이리 화가 났을까. 이 글은 김효재 전 한나라당 의원이 <월간조선> 2010년 12월호에 ‘작심토로: TV드라마의 정치인 희화화에 대한 현직 국회의원의 항변’이란 제목으로 쓴 것이다. 김 전 의원은 당시 비교적 높은 시청률(최고 28.3%)로 방영 중이던 SBS 드라마 <대물>을 보고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정치인 스스로의 책임일 것이다”라고 반성하면서도 “정치인은 아무나 지나가다 발로 걷어차도 괜찮은 ‘상갓집 개’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드라마 속 정치인들은 온갖 비리에 연루됐고, 약자에게 ‘갑질’을 일삼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김 전 의원이 억울함을 토로하던 시기에 <대물>뿐만 아니라 <시티홀>(SBS·2009), <프레지던트>(KBS·2010) 등 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가 잇따라 나왔다. 사극이나 실화를 재구성한 1~5공화국 시리즈 등 ‘역사’에 머물렀던 정치드라마가 현실 국회와 정치로 눈을 돌린 것이다. 장르나 전개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이 세 드라마의 뼈대는, 국민의 불신을 받는 부정적 이미지의 다수 정치인과 ‘선의와 진정성’으로 정치를 하려는 소수 ‘좋은 사람’의 대립이다. 용접공 출신 해고노동자가 국회의원이 된 이야기를 다룬 <어셈블리>(KBS·2015) 역시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정치드라마가 ‘촛불혁명’ 3년, 총선을 1년 앞둔 올해 부활하고 있다. 5월에 종영한 <국민 여러분!>(KBS)을 시작으로 <보좌관>(JTBC·7월 종영, 시즌2 11월 방영 예정), <60일, 지정생존자>(이하 <지정생존자>, tvN·8월 종영), <위대한 쇼>(tvN·방영 중) 등 네 편이 연달아 시청자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정치드라마가 기지개를 켰던 2010년은 정권 교체(이명박 정부) 뒤 집권 중반기였고, 정치드라마들이 부활한 올해는 촛불 뒤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중반기에 접어드는 때다. 9년 만에 돌아온 정치드라마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시청자는 드라마가 다루는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어떤 마음을 투영하고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 음악 등 모든 문화 콘텐츠는 그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구성원들의 생각과 욕망을 반영한다. 정치를 다룬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논문 ‘한국 픽션 정치드라마의 정치 재현: <시티홀> <대물> <프레지던트>를 중심으로’(<평화연구> 2012년 가을호)는 “정치드라마는 혼탁한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상을 발견하는 기쁨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중략) 현실의 정치 현상과 닮아 있는 드라마 속 정치 현상을 통해 현실정치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대중의 정치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세 편의 정치드라마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 정의가 승리하게 된다는 정치 판타지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고 설명한다. 드라마 속 ‘나쁜 정치인’은 시청자가 바라보는 ‘현실’이고, ‘좋은 정치인’은 시청자의 ‘꿈’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정치를 혐오하면서도, 정치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놓지 않는 ‘모순된 마음’으로 갈팡질팡하는 유권자의 마음과 연결된다.
선악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인물들
2010년 드라마 속 정치와 정치인은 김 전 의원의 항변대로 ‘상갓집 개’였다. 한국 사회의 ‘정치 혐오’가 고스란히 드라마 배경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2019년 정치드라마들은 9년 전과 차이를 보인다. 정치에 대한 긍정적 시선이 깔리고, 권력을 탐하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정치인들 외에 다양한 유형의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선악의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현재 방영 중인 <위대한 쇼>의 주인공 위대한(송승헌)은 좋은 정치를 하고 싶어 의정 활동에 힘을 쏟는 정치인이지만, 재선을 위한 총선을 앞두고 자신에게서 떠난 유권자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릎에 보호대를 몰래 차고 삼보일배를 하는 등 ‘쇼’를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보좌관>에서 주인공 보좌관 장태준(이정재)은 6g짜리 ‘금배지’를 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기는 게 중요하죠. 세상을 바꿔보겠다면서요. 그럼 어떻게든 이겨야 뭐라도 할 거 아닙니까”라는 대사는 드라마 속 장태준 캐릭터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억울한 사람들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초심’을 버리지 못하고, “정치는 사람을 위하는 길이야. 사람을 보고 가면 방법은 있어”라는 선배 정치인의 말을 외면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신념’과 ‘현실’에서 갈등한다. <지정생존자>의 박무진(지진희)은 ‘정치는 하나도 모르는’ 과학자 출신 전 환경부 장관이지만 ‘좋은 사람’이 악을 응징하는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현실과 타협하며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인물이다.
‘정치는 악’이라는 기존 명제를 걷어내자, 2019년의 정치드라마는 더 현실에 가까운 정치인과 그들이 처한 갈등에 입체적으로 다가선다. 과거처럼 ‘국회 밖’의 선한 인물이 국회나 청와대로 들어가 ‘한 방’에 모든 것을 바꾸는 전개가 아니라, 신념과 현실 사이에 수시로 갈등하고 유권자 표를 얻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정치가 그려진다. 19~20대 국회에서 보좌관을 지낸 김성회 정치연구소 씽크와이(ThinkWhy) 소장은 “예전 드라마에서 정치인들은 고급 일식집에서 밀담을 나누는 게 하는 일의 전부였다. 반대로 생판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모든 것을 혁파하고 새 구조를 만드는 전개였다. 하지만 올해 나온 드라마들은 실제 정치판의 작동 원리를 그리며 입법 과정 등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미묘한 지점을 짚고 있다”고 평했다.
<보좌관>은 국정감사와 입법 과정에서 의원과 보좌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정생존자>는 청와대의 의사결정 과정, 청와대와 국회의 관계 등을 취재를 바탕으로 묘사했다. 한부모가정 지원, 낙태죄 폐지 입법에 힘쓰는 <보좌관> 강선영 의원, ‘합리적 보수’의 품격을 보여주는 <지정생존자>의 윤찬경 보수 야당 대표 등 주체적인 여성 정치인에 대한 묘사도 과거와 다르다. 김성회 소장은 최근 방영 예정인 한 정치드라마를 자문해줬는데, 드라마 작가들이 예전과 달리 ‘국회 회의록’을 읽으며 극의 얼개를 짜고 있다고 귀띔했다.
촛불 염원이 드라마에 투영?
<지정생존자>에서 대선을 앞두고 차별금지법을 입법하려는 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과 참모들이 벌이는 논쟁은 신념과 현실에서 갈등하는 ‘정치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각을 좀 해보세요. 지금 당대표 의지로 (차별금지법) 국회 의결이 가능한 일인가요. 순진한 겁니까, 계산이 안 되는 겁니까?”(차영진 청와대 비서실장)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산만 하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정치는 언제쯤 가능한 겁니까? 정권 재창출하면 뭐합니까. 5년 내내 법안 하나 발의 못하고 지지율 계산만 할 거면서?”(김남욱 청와대 대변인)
“그만 못합니까? 두 사람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차별금지법이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 얼마나 어려운 법인지 그만하면 충분히 이해됐습니다. 지금 이순간부터 두 사람은 찬성이니 반대니 한마디도 하지 마십쇼. 내가 결정합니다.”(박무진 대통령 권한대행)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차별금지법에 반발하는 보수 기독교계 앞에서 입법이 지지부진한 ‘현실’과 겹쳐지는 장면이다. 20년 넘게 국회 보좌관을 하고 책 <보좌의 정치학>을 쓴 이진수 전 보좌관은 “정치를 하는 목적은 가치 실현과 권력 장악이라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차 실장과 김 대변인의 논쟁에서 보여주듯, 두 목적은 늘 긴장 관계다. 권력을 잡은 뒤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모범 답안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정치의 본질을 조명한 드라마들은 정치인의 자질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정치학 고전인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국가를 ‘강제력에 근거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로 규정하고, 정치는 국가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활동으로 정의했다. 이에 베버는 직업정치인이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이라는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정치적 행위가 가져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한다. 신념윤리란 선과 악을 구분하며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는 태도라면, 책임윤리란 신념을 추구하는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결과를 예상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는 태도다. 둘 사이의 우선순위는 없지만 베버가 책임윤리를 상대적으로 강조했다고 정치학자들은 분석한다.
과거 정치드라마가 신념윤리에 무게를 뒀다면, 2019년 드라마들은 책임윤리를 조명하는 듯하다. <보좌관>의 장태준은 “이겨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끊임없이 되뇌고, <지정생존자>의 박무진은 차별금지법 입법을 포기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다시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지정생존자>는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희생된 양진만 대통령(김갑수)의 선한 의도(신념윤리)가 현실에서 무참하게 좌절된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촛불혁명 뒤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책임윤리를 조명하는 드라마의 출현은 우연일까. 부의 집중, 소득 격차, 청년실업 등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보게 해달라는 ‘촛불의 염원’이 드라마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좋은 정치가 좋은 정치인만으로 가능할까
물론 베버와 이들 드라마는 ‘훌륭한 지도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좋은 정치는 좋은 정치인으로만 가능하지 않다. 이진수 전 보좌관은 “진짜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세상’이다. 정치의 목적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정치는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꿈꿀 때 시작된다”고 말한다. ‘좋은 세상’에 대한 사회의 열망이 정치의 바탕에 깔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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