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오래전 일이라고 담담히 고백하면서도 A는 울었다. 어느 날 A의 회사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팀원 모두에게 배달된 편지에는, A는 동성애자인데 이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지난 직장에서도 건강검진을 피하려고 2년이 다 돼가자 퇴직 후 이곳으로 옮겨온 걸 보면 에이즈가 의심되니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발신인은 놀랍게도 ‘우리 중 1인’이란다. 편지를 받은 팀원들은 경악했다. A는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은 맞지만 에이즈는 허위라고, 거듭 해명했다. A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사실은 ‘아우팅’이므로), 해명하면 할수록 변명의 늪에 빠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몇몇 동료는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당신을 믿으니, 얼른 잊어버리라고 했다. A는 자신을 믿는다는 우리 사이에, 편지를 보낸 ‘1인’이 속해 있다는 게 소름 끼쳤지만, 함께 일하며 부대끼자면 잊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얼굴 없는 이의 ‘서든 어택’그날 이후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때때로 함께 나눠 먹던 도시락은 A 혼자 먹어야 했고, 티타임인가 싶어 다가가면 모두 주섬주섬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퇴근길 주점에서는 자신만 뺀 팀 회식이 열리기도 했다. 깊은 밤, 침대에 누우면 A는 하릴없이 동료들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언젠가 B가 도와달라던 프로젝트를 너무 바빠 돕지 못했던 게 기억났다. 아무리 바빠도 도왔어야 했는데…. 통계 자료가 부실한 것 같다고 C에게 했던 조언은 이제 와 생각하니 어쭙잖은 충고였다. 인사해도 눈을 잘 맞추지 않던 D는 나에게만 그랬던 걸까. E는 걱정하지 말라고 가장 먼저 말해준 사람이지만 그의 말은 늘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달라 찜찜했다. F는, F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심은 출구를 찾지 못했다. ‘1인’이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불안은 A의 영혼을 잠식했다. A는 우울증 약을 먹어가며 버티다 고심 끝에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사안인데다 팀원 전체를 용의자로 두고 조사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A는 발길을 돌렸다.
A는 내가 을 쓸 당시 만났던 30대 후반의 남자다. A가 떠오른 건 비슷한 ‘아우팅’ 사건을 최근 다시 보았기 때문이고, 이들의 고통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나 역시 얼굴 없는 이의 지독한 독설에 피멍이 맺힌 까닭이다. 이들이 홀로 지새웠을 까만 밤을 내가 복원해본다.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악이 매복된 삶에서 어떤 사람들은 운 없게 지뢰를 밟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게 운이라면 우리 모두는 시차만 다를 뿐 사는 동안 언젠가는 지뢰를 밟을 것이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는 얼굴 없는 이의 ‘서든 어택’(갑작스러운 공격)에 날개를 꺾인 사람들이 이미 깨져버린 평화를 되찾아보려고, 혹은 사람이 악한 행동을 저지를 때 그의 내면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이해해보려고 악의 기원이나 본질, 인간의 잔혹함을 다룬 책들을 들춰볼지 모른다. 그러나, 소용없다. 몸에 딱 달라붙은 마음은 늘 머리보다 먼저 고통에 반응하고, 이성으로 낙관하는 일도 나와 안전거리가 확보됐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무용해 보일지라도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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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수많은 우리 중 1인에게 당부한다. 관심의 방향을 타인이 아닌 당신 자신에게로 돌리길. 그리하여 당신 안에 깃든 시기, 미움, 원망, 분노, 파괴, 인정 욕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생김새에 대해 남이 아닌 당신 자신에게 편지하길. 그게 어렵다면 제발 부탁인데, 당신 성장에 도움을 줄 취미를 가져보길.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자꾸 하다보면 드물게 성찰에 이를 수도 있다.
김민아 저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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