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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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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스티커

하재영 작가·<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등록 2019-08-29 02:15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스스로를 20대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 설치미술 작가 ‘성인소년’은 최근 ‘그거 그냥 스티커예요’라는 계정에서 참여형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눈알 모양 스티커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서 남자 화장실에 붙이고, 인증사진을 찍어 계정에 제보하는 방식이다. 작가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시피, 이 프로젝트의 의도는 여성이 불법 촬영 등의 범죄에 노출되는 현실에서 “눈알 모양 스티커로 남성도 짧게나마 공포를 체험”하는 것이다.

공중화장실에서 무심코 올려다봤더니

계정 이름처럼 ‘그냥 스티커’일 뿐이지만 일부 남성 누리꾼은 작가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그만두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살해 협박을 하고 있다.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형태의 스티커가 진짜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사회의 많은 공간이 여성과 남성에게 다른 의미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사회를 누가 점유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공중화장실은 남성에게 대소변을 해결하는 일상적인 공간이지만 여성에게는 불법촬영, 훔쳐보기, 성폭행 등의 위험이 도사린 공포의 공간이기도 하다. 많은 여성이 공중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비어 있는 칸의 문을 일일이 열어보는 이유는 닫힌 문 뒤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변기에 앉기 전 칸막이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이유는 어딘가에 카메라가 설치됐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때로는 칸막이 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 또한 공중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중 무심코 위를 올려보았다가 옆 칸에 숨어서 나를 훔쳐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뒤로는 혼자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늘 두렵고 긴장된다.

공중화장실만이 아니다. 한밤의 택시 안, 어두운 골목길, 만원 지하철과 버스, 엘리베이터…. 많은 여성이 매일 이용하는 수많은 장소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더 넓게 보면 돌봄노동에서 흔히 주양육자가 되는 여성에게는 ‘노키즈존’(영유아·어린이를 동반한 고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곳)의 식당과 카페부터 수유 시설이 없는 화장실과 휴게실까지,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공간이 수없이 많다. 이 사회 또한 물리적으로 하나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공간에 대한 불안과 불편은 결국 ‘이 사회가 누구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눈알 스티커 같은 일종의 ‘미러링’(따라하기)은 같은 장소에서 아무 두려움과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신이 누리는지조차 몰랐던 특권을 깨닫게 하는 효과를 준다. 많은 사람이 특권을 재벌과 고위 권력층만이 가진 특별한 권리로 이해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적 조건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혜택도 특권이다.

7월에 나온 의 저자 김지혜는 이런 특권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사회적으로 가진 조건이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 이것이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상태다. 이를테면 두려움 없이 공중화장실을 사용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특권,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서울 중심 사회에서 주류의 조건을 갖춘 이는 그렇지 않은 이의 일상화된 차별과 불편을 알지 못한다. 많은 경우,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알아차리는 계기는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했던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에 균열이 생기는 때다. 그 상태에 작게나마 균열을 내보려 성인소년이 선택한 것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스티커였다. 진짜 카메라도, 진짜 눈도 아닌, “그냥 스티커”. 성인소년의 기사를 넘기자 다음 같은 기사가 눈에 띈다. ‘70대 남성, 호프집 화장실에 몰카 설치.’

하재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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