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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계춘과 같은 병을 앓았다”

일제강점기 민중의 극한 생존 다룬 <곱게 자란 자식> 이무기 작가 인터뷰
등록 2019-08-23 10:39 수정 2020-05-03 04:29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1회 깐난이가 숨어 있는 광으로 괭이들이 몰려오고 계춘이 늘어진 보자기를 끌고 마을에 들어선 1942년. 총 114회, 만 5년간의 대장정 첫 회 장면이었다. 곧 만화는 왜 이런 상황으로 몰렸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며 1938년으로 플래시백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일본의 강제징용 판결과 연계된 무역보복과 선언문 일색의 베스트셀러 1위 , 이승만 동상 앞에서 “국정 대전환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하는 야당 대표가 있는 2019년, 일제의 수탈로 만신창이가 돼버린 전라도 어드메 삼곡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동네의 소름 끼치는 이야기에서 시작

광복절 전날 개막한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부천만화대상에 을 선정했다. 이무기 작가(사진)를 부천국제만화축제 개막 전 만났다.

작품은 1년 전에 완결됐는데 인터뷰는 모두 사양했다. “무지만 탄로 난다”와 “역사 이야기 작가가 깨방정 떠는 사람”이란 것을 들키기 싫어서라고 한다. 키워드가 ‘액션 코믹 병맛’인 와 키워드가 ‘코믹 액션 병맛’인 를 거쳐 ‘드라마 역사 일본군’이 키워드인 을 그렸다. 이무기 작가의 작품은 역사 드라마, 현실은 액션 코믹이다. 필명이 이무기면서 “(광주) 대촌에서 용 났지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작가는 광주시 대촌에서 태어나 지금껏 광주에서 만화를 그리며 살고 있다.

전작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었다.
개그 만화로는 돈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어느 날 어머니한테 동네마다 그런 이야기는 하나씩 있던데 우리 시골에는 뭐 없냐고 물어봤다. 어머니가 아무도 없는데도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친척 중 한 명이 ‘위안부’를 갔다가 돌아왔는데 머리가 다 빠지고 미쳐버렸다. 후에 들으니 매독 걸리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정신병이 온다고 하더라. 그리고 일본군이 본보기를 보인다고 임신부를 은행나무에 매달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조용히 이야기하니까 소름이 쫙 끼치더라. 마을에는 경찰지서가 나간 자리에 대나무밭을 만들었다. 어린 시절 놀다보면 터가 남아 있었다. 그런(일제강점기가 바로 옆에 있는) 공간에서 놀았다.

1화 장면이 77화로 연결되는데,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나.
처음에 20화만으로 끝내려고 했다.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려 했다. 길게 할 정도로 역사를 알지 못한다. 아는 체만 하고 끝내자였다. 세부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 자료를 찾다보니, 등잔이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 생겼는지, 그때는 뭐가 있었나 없었나 찾다가 이야기가 가지 쳐 나와서 정신없이 늘어났다. 자료 조사도 많이 해야 했다. 만화 연재는 틀렸을 때 뒤로 못 가니까, 발 한 번만 삐끗해도 그러니까.

의 설명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평범한 시골 소녀 이야기, 소녀만 평범한 그런 잔인한 이야기’다. 삼곡면의 다섯 자식을 둔 심씨 집안에서 깐난이는 넷째다. 위로는 항석·용석·귀석 오빠가 셋, 아래로는 젖먹이 막둥이가 있다. 깐난이는 개똥이와 동네 제일 예쁜 순분이 언니와 친하다. 처음에는 된장남이라든지, 소박맞지 않기 위한 훈련이라든지 등 코믹 요소가 강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 ‘먹구름’이 낀다. 집안의 중요한 철붙이를 빼돌린 것이 들켜서 본보기로 매를 맞고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눈이 먼다. 복수의 순간 트럭이 마을 젊은이들을 전부 태우고 간다.

조선 민중의 풍속화

만화는 소락빼기, 해름참, 징상시럽다, 속아지, 외하래(외할아버지) 등의 단어와 “그놈 심이 장사네, 쌀밥 묵었냐” “갖고 온 놈은 개놈인디 맛은 상놈이시” “첨 본 새끼가 싸가지 없이 다리를 꼬고 앉았네”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가 넘친다. 욕도 “니기미 지기미 니개미 니거미 니매미” 운 맞춰 한다. 등장인물은 넓거나 좁거나 튀어나오거나 부리부리하거나 얇거나 두껍다. 조선 민중의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인물이 못생긴 건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렇기도 하고, 인물이 망가지려면 못생긴 사람이 낫다. 잘생긴 원빈이나 강동원은 망가뜨려도 맛이 안 난다. 수묵화 느낌은 사진전에서 본 것이 인상 깊어서 참조해보았다. 그림은 지금까지 혼자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누가 너하고 하겠냐고 한다. 일이 너무 많다.”

버마(미얀마)의 위안소 장면은 정말 보고 나서도 힘들었다.
나 역시 힘들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깐난이 슬픈 감정도 있지만 박출세(박주사로 불리는 악인) 같은 악인의 감정도 그 사람이 되어보아야 나오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소름 끼치고 기겁을 하려면 나는 강도가 더 세게 많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다 성깔이 이상해지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버마 장면은 나도 그림을 그려놓고 나서도 너무 끔찍해 어둡게 해버렸다. 6년 연재가 끝나고 나서 다시 보기도 싫었다.

탄핵 시기 때 독기가 빠지기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탄생한 명장면도 있다. 마을 청년을 태우고 가던 트럭에서 도주자가 생기면서 군인과 마을 청년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진다. 그 자리에서 첫째와 셋째가 죽는 장면이 어머니가 꿈을 들려주는 장면과 교차하며 진행한다. “우리 항석이가 힘이 없는 것이 하도 못 멕여서 그런 것인디”라는 어머니의 내레이션과 함께 항석은 힘을 내서 반항하고, 몸이 시체가 된 귀석은 꼿꼿이 선 채로 가족을 지켜달라 계춘(주먹 패거리의 일원)에게 반복해서 주문한다. 작가는 “그리는 게 고통이어서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한두 이야기를 엮고, 동시에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끝나고 나니 두통이 사라지더라”고 했다.

언제나 머릿속에 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계춘의 병이 이무기 작가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끔찍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못 볼 장면이 끝난 뒤 이야기를 붙이는 전개 방식도 그 때문이다. 빛이라곤 없는 상황도 빛나는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산속을 달릴 때 숲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나 어둠 속에서 밥을 먹을 때 등잔 하나에 의지한 실루엣 등이 그렇다.

4부 연재를 1년 반 만에 재개한 것 등 휴재 기간이 긴 것도 연재가 길어진 것의 한 원인이다. “허리가 두 번 나갔다. (옆으로 쓰러지는 것 같은 동작을 하면서) 이렇게 툭 하고 넘어가더라. 젊을 때 체력만 믿고 하루에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씩 만화를 그리다보니까.” 취재를 위해 산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고 기어서 산을 나오기도 했다. 인상적인 댓글로 “다른 사람은 걱정 안 되는데 이 작가는 걱정된다”가 있다. 작가는 “지금은 운동도 하고 재활운동도 한다”.

연재가 길어지면서 나라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이 올랐다고 하던데.
유일하게 힘이 빠졌던 시기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기다. 독기 품고 뛰어가는데, 뛰는 내가 민망해지는 상황이었다. 외줄 타는 심정으로 내가 이 정도까지 할게, 되나 안 되나 봐보자, 이런 심정이었는데, 내가 이걸 해도 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더라. 사실 만화를 나라 대 나라, 이념 대 이념으로 그리진 않았다. 철학도 역사관도 없었다. 그저 생존, 극한의 생존을 그리고 싶었다. 만화에서 할 이야기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언제 새 연재가 시작되나.
올해 안에 들어가려고 한다.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일상 속 에스에프(공상과학)다. 친했던 애들이 기이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싸우게 되는 이야기다.

부천=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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