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갈 무렵부터다. 딸 친구 엄마 몇몇이 ‘구체관절 인형(관절을 둥글게 해 움직임이 자유로운 인형·이하 구관) 괴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도 졸라서 비싼 인형을 사줬더니 더 비싼 인형 물품을 사느라 용돈을 탕진하고, 구관 유튜브에 푹 빠져 산다는 얘기였다. 4학년이 끝나갈 무렵엔 구관에 대한 부모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더 자주, 더 크게 들렸다. 그래도 웃어넘겼다. 나만 안 사주면 그만이니까.
입장객 8할은 초등 고학년 딸과 부모북한산 인수봉에서 “야호”를 외치고 싶었던 화창한 6월15일, 나는 딸과 함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세텍(SETEC) 전시장 앞에 ‘3천 명(입장 제한 인원) 중 한 명’이 되어 하릴없이 줄을 서고 있었다. 공식적으론 아침 7시, 비공식적으론 새벽부터 ‘오너’(인형 소유주)들로 붐볐다. 국내 최대 인형 마켓 행사인 ‘제74회 돌프리마켓 서울’(이하 서프) 행사장 문이 열리길 고대하면서. 그 말인즉슨 ‘안 사주면 그만’이라는 내 안이한 결심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딸이 ‘제일 싼’ 포켓 사이즈 구관을 “제일 예쁘다”고 고른 게 천만다행이지만, 그래도 가격은 10만원대 후반이었다. ‘만 10세 이상’을 만만하게 보고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따위의 백지수표를 날렸다간 큰일 난다는 교훈을 얻었다.
대표적인 ‘아트 토이’ 구관은 비싼데다 세심하게 다뤄야 하기 때문에 어른들의 장난감이었다. 인형 제조사 주의사항에도 “아동용 완구(만 14세 이하)가 아니”라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어림잡아보니, 입장객 10명 중 8명은 초등 고학년 딸과 그 부모들이었다. 어른들의 ‘마이너 취미’였던 구관이 초등학생의 ‘핵인싸 취미’가 되는 열풍의 현장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국내 돌프리마켓 역사가 벌써 17년이다. 2002년부터 서울·부산·경기·광주에서 각각 1년에 4~5차례 열리고 있었다. 전국의 인형 관련 제품 업체와 동아리가 전시장 안에 부스를 차려놓고 제품을 파는 행사다. 이번엔 150여 개 업체와 동아리가 참가했는데, 대부분 구관 관련 업체다. 구관은 주문에서 배송까지 두 달이 걸리는 수작업 제품이다. 딸은 “이틀 단축된 58일 만에 받았다”며 특혜라도 받은 듯 기뻐했다. 서프에서는 그 두 달을 건너뛰고 현장 구입이 가능했다.
영롱한 유리(혹은 아크릴) 눈동자, 창백할 정도로 흰 우레탄 피부에 살포시 도포된 파스텔톤 메이크업, 솜털처럼 가느다랗지만 탄력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속눈썹…. 뱃사람들을 난파케 했다는 로렐라이에 홀리듯 나도 모르게 서프에 전시된 구관에 손댈 뻔했다. 하지만 남의 구관에 손대면 안 된다는 건 오너들의 불문율이라고, 딸이 해준 말이 떠올라 정신을 차렸다. 구관은 고무나 플라스틱이 아닌 우레탄이 많아 쉽게 착색된다. 우레탄 ‘보디 파츠’(몸 부위)를 S자 고리와 고탄력 고무줄로 연결한 섬세한 인형이라 망가지기도 쉽다. 손때라도 묻으면 낭패고,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다. 무엇보다 오너들은 “인형을 산다”고 하지 않고 “아가를 들인다”고 한다. 실제로 아기 포대기 같은 솜가방으로 인형을 감싸 보호한다. ‘남의 아가’를 함부로 만지는 건 예의가 아닌 것이다.
석 달 전 딸이 처음 “서프에 가고 싶다”고 졸랐을 때, 나는 ‘서핑 배우고 싶다’는 뜻인 줄 알고 뜬금없어했을 정도로 구관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서프 부스에 적힌 각종 전문용어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성장’(딸의 칭찬)했다. “엄마, 안구 붙이게 스컬피 좀 사주세요.” “음… 스컬…로 뭘 한다고…?” “아가 헤드에 눈 붙일 때 쓰는 점토 좀 사달라고요.” “엄마, 파츠 연결하는 텐션이 끊어졌어요.” “음… 파츠? 텐션?” “구관 보디 부위들을 연결하는 장력줄이 끊어졌다고요.” 딸한테 외계어를 배우듯 사사한 지 석 달 만의 쾌거다.
내가 ‘셀프 성장’에 도취돼 한눈팔고 있을 무렵, 엄마라는 ‘혹’을 슬쩍 떼낸 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인파를 헤집고 다시 딸을 찾아낸 곳은 유명 구관 유튜브 계정을 운영하는 인형옷 업체 부스였다. 지갑에서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내 판매자에게 건네던 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저걸 제지할까, 경을 칠까, 그냥 둬야 하나’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용돈을 한두 푼 모아 사고 싶은 걸 산 아이에게 ‘과소비’를 질책해도 되는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줘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 겪는 난감한 상황에서, 나는 일단 ‘안 보련다’ 회피를 선택했다.
딸은 3월 초부터 ‘서프’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부터 “초등 고학년이면 용돈 관리를 연습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엄마를 설득해 하루 1천원씩 일주일치 용돈을 받아갔다. 심부름 쿠폰제를 시행한다며 느닷없이 10년 가까이 무료였던 심부름을 건당 200~400원씩 유료화했다. 용돈 기입장이 너무 깨끗한 게 수상했지만, ‘적어봐야 맨날 떡볶이 핫도그일 텐데’ 하는 마음으로 용처를 따져묻지 않았다. 짠순이인 딸의 기질을 믿는 구석도 있었다.
떡볶이가 되어 소화되거나 저금통으로 직행했을 거라 짐작했던 지폐는 딸의 지갑에 봉인돼 있다가 서프에서 날개를 달았다. 그제야 ‘리얼 핏줄 안구 10만원’ ‘청반바지 티셔츠 세트 3만8천원’ ‘메리제인 구두 2만6천원’ ‘헤어밴드 6천원’ 예쁘고 아기자기한 판매 물품 구석에 붙은 휘둥그레지는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속상한 마음에 판매자에게 “인형도 아니고 인형옷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푸념하듯 물었다. “수제로 한땀한땀 만들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딸이 석 달치 용돈을 모조리 제 옷보다 비싼 인형옷에 쏟아부었다는 충격적인 팩트는 아이의 ‘주제일기’를 보고 확인했다. ‘선생님이 부모를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부끄러운 와중에 ‘애한테 경솔하게 백지수표를 남발했다가 구관을 손에 쥐여준 내가 문제지’ 뒤늦은 자책부터, ‘용돈제를 유지해도 되나’ 현실적인 고민까지 골치가 아팠지만 답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석 달 용돈 모아 인형옷 산 딸 인정하기로‘미미 인형’ 세대인 엄마는 딸이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 거라 섣불리 예측했다(엄마가 미래를 내다보고 10년 전부터 1.5달러 ‘핫딜’ 때마다 바비를 샀다는 뜻이다). 딸은 바비를 건너뛰고 엄마가 알지 못하는 ‘구체관절 인형’의 세계로 직행했다(엄마가 모아둔 바비는 무용지물이 됐다는 뜻이다). 그러곤 친구들과 구관을 매개로 부모가 모르는 언어로 소통하며 질풍노도의 초기를 지나고 있다. ‘구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고마울 때도 있다. 딸은 전학 간 학교에서도 구관이 취미인 친구들과 금방 친해졌다. 엄마에겐 쓸데없는 비용을 유발하는 골칫덩어리 장난감이지만, 아이에겐 애착 대상이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화·사회 생활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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