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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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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썬’은 여성을 거래했다

친족 체계 본질을 ‘여성 거래’로 본 게일 루빈의 1975년 논문

여성을 선물·교환하며 깊어지는 남성들의 유대관계 지적해
등록 2019-06-07 12:19 수정 2020-05-03 04:29
게일 루빈의 ‘여성 거래’ 등 주요 논문을 엮은 책 <일탈>. 현실문화 제공

게일 루빈의 ‘여성 거래’ 등 주요 논문을 엮은 책 <일탈>. 현실문화 제공

요즘 ‘장학썬’이라는 말이 있다.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클럽 버닝썬 사건에서 한 자씩 따 만든 신조어다. 이 세 사건은 연예계, 법조계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상품처럼 주고받는 문화가 얼마나 일반적인지 보여준다. 가수 정준영은 친구들과 모의해 여성에게 약물을 투여한 뒤 성폭행하고 그 영상을 찍어 단체대화방에서 공유했다. 버닝썬 사내이사였던 승리는 성매매 알선과 성매매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버닝썬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승츠비’로 불리며 사업으로 성공한 아이돌이자 자수성가의 아이콘이었다.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는 건설업자 윤중천에게서 금품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접대 주체 가린 단어 ‘성접대’

이들 사건을 두고 언론에서는 ‘성접대’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그 말에선 누가 접대의 주체인지가 가려진다. 여성은 제공되거나 거래되는 것이지 접대하는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접대 주체는 승리, 윤중천 등과 같이 자본과 이익을 주고받는 남성이다. 이들이 여성을 교환하는 것은 승리가, 윤중천이, 김학의가 괴물이어서가 아니다. 그 행위의 부당함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여성을 자원으로 교환하는 것은 일반화했다.

이 거래는 때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신화화한다. 심청은 아버지가 절과 계약한 공양미 300석을 만들기 위해 뱃사람들의 제물이 되었다. 황석영의 에서 형상화한 현대판 심청은 동아시아 바다를 넘나들며 성을 파는 여성이 된다.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는 건, 실상 딸을 공양미와 맞바꾼다는 뜻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여성은 언제든 자원으로 교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문화에서는 사장님 옆에 여성 직원이 앉아야 하고, 꽃다발은 가장 어린 여자가 전해야 하며, 여자 아이돌은 방송에서 무조건 애교를 부려야 한다. 이처럼 여성이 교환되는 구조를 이론화한 것이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게일 루빈이다.

1949년생인 루빈은 68혁명의 기운이 미국을 휩쓸던 1970년대에 자연스럽게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을 자각했다. 그는 1975년 20대 중반에 발표한 논문 ‘여성 거래: 섹스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노트’에서 “여성을 원자재로 간주하고 가내 노예화된 여성으로 가공하는 체계적인 사회적 장치”로서 섹스/젠더 체계를 파악한다. 루빈은 당시 미국 좌파들이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잉여가치를 독점하는 자본주의에서 찾는 것에, “도무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조차 여성은 억압받고 있다”고 반박한다. 여성이 대를 이을 수 없고 지도자가 되지 않으며 종교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 거래’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초역사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찾는 정신분석학이나 생산과정에서의 계급적 패배에서 찾는 마르크시즘과 달리, 결혼과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친족 구조 형성에서 찾는다. “여성은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하인, 아내, 재산, 플레이보이 바니걸(미국 성인 잡지에 나오는 토끼 분장을 한 여성), 성판매 여성 또는 인간 속기록 기계(타자기)가 될 뿐이다. 금이 그 자체로 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중략) 이러한 관계에서 떨어져나오면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조력자가 아니다.” 누가 이 관계를 만들고 이득을 보는가. 우리가 ‘성접대’라는 여성 거래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이 지점이다.

국제결혼지원금은 지참금과 뭐가 다른가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사회에서 친족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뜻했다. 친족은 성적 행위 같은 사적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정치·축제 같은 공적 영역을 조직했다. 생산과 분배, 적대와 연대, 종교의식과 사회의식이 모두 친족 구조 안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친족 구조가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한 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교환 파트너들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거나 확고히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모스의 증여론을 바탕으로, 결혼이 이 선물 증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임을 지적한다. 그는 친족 체계의 본질을 남자들 사이의 여성 거래, 즉 여성을 증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성을 선물로 주는 것은 말이나 소를 주는 것과는 다르다. 여성을 선물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 친족은 남성과 여성의 위치와 권리 등 권력관계를 만들어낸다.

루빈은 이러한 여성의 증여가 친족 구조를 형성하고 가부장제 자본주의를 세우는 원리가 된다고 지적한다. 근친상간과 동성애 금지는 여성 교환이 제대로 되도록 보장해주는 구실을 한다. 여자 형제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 하기에, 여성은 자기 친족 밖에서 결혼 대상을 찾아야 하고, 다른 여성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여성은 결혼으로 증여되고, 전쟁에서 전리품이 되고, 호의 표시로 장식된다. 결혼식장에서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넘겨주는 관습은 이런 교환의 문화적 흔적이다.

이런 선물과 교환은 참여자들에게 특별한 신뢰관계, 연대, 상호 원조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남톡방’(남성들만 속한 단체대화방)에서는 동료와 친구를 포함한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품평하고 교환한다. 대학에서는 신입생 외모를 품평하고 회사에서는 불법촬영물을 공유한다. 취미생활을 위한 카메라 동호회에서는 여성 모델을 데려다 야한 의상과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여성을 선물하고 교환하는 문화는 신뢰를 바탕으로 자원을 획득하며 공동체 유대를 깊게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는 ‘농촌 총각’을 위해 국제결혼지원금을 지급해왔다. 최근 경상남도는 1인당 180만원을 부담하던 예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중단 결정으로 오히려 지금까지 국제결혼하는 ‘농촌 총각’에게 약 600만원의 지원금을 줬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는 외국에서 여성을 사오는 행위를 국가가 묵인하는 데서 더 나아가 지원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물로서 여성과 지원금으로서 여성, 우리는 지참금을 주고받고, 염소와 신부를 바꾸던 시절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가.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섹스/젠더 체계는 유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점이다. “섹스/젠더 체계는 불변하는 억압적 장치가 아니며, 전통적 기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상실했다. 그럼에도 저항이 없다면 그것은 저절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루빈의 지적은 “섹스/젠더 체계를 정치적 행동으로 재조직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성 위계화하면 억압적 젠더·섹스 체계 돼

여성을 거래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루빈은 이후 에서 좋은 성과 나쁜 성, 바람직한 섹슈얼리티와 불건전한 섹슈얼리티 등의 구분을 비판하면서 정상성을 중심으로 성을 위계화하는 문제를 비판한다. 성의 위계화는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규범을 만들어내고 이는 다시 억압적인 섹스/젠더 체계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빈은 강제적 섹슈얼리티와 성역할 제거를 꿈꾸었다. 20대에 세계를 놀라게 한 논문 ‘여성 거래’를 발표하고 가족과 신앙, 건강한 삶이라는 미국적 가치를 따르지 않았던 그는 이렇게 여성을 교환하는 문제에 가장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답을 제시한다.

허윤 문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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