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2019년 9월10일의 일이다. 한국도로공사 본사에서 점거농성 중이던 고속도로 요금소 수납원 250명은 강제 해산에 저항하기 위해 윗옷을 벗었다. 대다수가 여성인 요금수납원들이 현장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이 장면을 본 많은 사람이 1970년대 동일방직 노조의 여공들과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해온 할머니를 떠올렸을 테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의 분기점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미로 옷을 벗었다. ‘옷 벗은 여성의 몸에 손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참정권 얻으려 모성 강조</font></font>
분쟁 현장에서 여성의 삭발은 더 큰 주목을 받는다. KTX 여승무원 노조, 급식 노동자 그리고 장애학교 설립을 위해 싸운 어머니들까지, 여성은 광장에서 삭발을 감행했다. 그리고 공론장은 그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딸’임을 강조한다. ‘여성임에도’ 삭발했기에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노동자나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때, 삭발하거나 대오를 짜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노동자나 시민이 여성이었을 때, 그들은 언제나 여성이라는 성별화한(gendered) 존재로 가시화한다. 여성을 비정규직으로 양산하는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적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역설은 여성이 역사와 광장의 주체가 될 때 종종 나타난다. 광장에서 그들은 ‘여성’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이들을 향해 어머니, 딸 등 가족화된 호명을 거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로서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여성은 누군가의 가족으로 재현돼 내가 보호하고 지켜야 할 가족을 연상시켜야 한다.
페미니스트 역사가인 조안 스콧은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철폐하고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오히려 여성임을 강조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을 분석한다. 그는 (Only Paradoxes to Offer, 앨피 펴냄, 2017)에서 프랑스혁명 때 여성 참정권자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신체적 성(sex)과 정치적 권리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주장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강조하며 참정권을 요구했지만, 여성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모성이나 공감 능력 등 여성성을 동원해야 했다. 프랑스혁명 당시 여성 참정권 투쟁을 벌였던 잔 드로앵은 여성은 공공생활에 맞지 않는다는 인식에 맞서 모성을 강조했다. 여성은 출산과 양육이라는 사회적 노동을 하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TV 출연으로 인기를 끌던 한 피부과 의사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자신은 아내가 두 아이를 낳을 때까지 투표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자녀들 역시 스스로 세금을 낼 때까지는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해당 발언이 공개된 즉시 출연하던 방송에서 하차했다. 이 시대의 성차별 발언이 19세기 유럽에서는 참정권 운동 과정에서 제출된 근거였다. “동등하다고 여겨지기 위해서 여성은 남성과 똑같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 평등 요구를 인정받으려면 육체적 차이에서 비롯된 불평등한 대응에 항의해야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왜 여성을 어머니로 규정했는지 묻자</font></font>
스콧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시민권, 개인의 권리, 사회적 의무 등 시민이 되기 위해 성차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여성이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여성성이 시민됨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근거는 잔 드로앵의 경우처럼 모성애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남성 못지않은 이성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즉, 성차로 인한 차별을 만들지 않기 위해 성차는 계속 담론 중심에서 논의돼야 했다. 스콧은 이것이 페미니즘이 부딪히는 근본적 역설이라고 주장한다.
는 스콧이 역사학 방법론으로서 젠더를 제시한 이래 생겼던 논쟁에 대한 대답이었다. 스콧은 젠더를 영구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규정된 차이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역사적 환경에 따라 만들어지는 차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제안하는 페미니스트 역사 쓰기는 역사적으로 비가시화된 여성들을 복원하고 여성 인물이나 여성 문화에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여성이 특정 맥락에서 만들어지는 관념과 지식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면서 중요한 것은 여성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 언어, 개념 등을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했다. 생물학적 여성성과 젠더 사이의 등호를 제거했을 때, 여성사는 무엇을 근거로 존재하냐는 논란이다.
‘여성’ 없이 어떻게 여성사를 이야기하냐는 비판에 대해 스콧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젠더라는 구분은 생물학적 성을 자연화하고, 생물학적 성 역시 사회적 성과 마찬가지로 지식체계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응수한다. 억압된 여성의 역사를 가시화한다는 일차적 목표가 달성된 뒤에는 여성성을 긍정하는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차이가 갈등을 일으키고 연합하는 장소” “정체성이 일시적인 안정성에 의해 획득되는 장소”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지는 장소”로서 젠더사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잔 드로앵이 모성성을 강조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참정권자가 차이를 강조하며 여성을 어머니로 규정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책 제목이 바뀐 또 하나의 역설</font></font>
스콧의 문제의식은 내가 여성문학사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답답함과 맞닿았다. 여성이 쓴 글이 모두 여성문학에서 일종의 전범으로서 가치 있다면, 여성문학이 여성이 쓴 글에 문학사적 위상을 부여한다면, 여성문학사는 남성을 보편 주체로 상상한 문학사의 부록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남성 중심 보편사에 여성의 역사를 더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남성들의 문학사를 해체하거나 뒤집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젠더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문학사에 ‘남성성’이라는 젠더를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보편은 사라지고 성별화된 문학사가 남을 것이며 여성문학을 ‘일부’로 취급하는 경향에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문학사가 아니라 문화사, 젠더사, 사회사 등과 교차하는 복수적이고 다성적인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가 처음 번역됐을 때 원제를 살려 로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책 제목은 ‘위대한 역사’가 되었다. 스콧이라면 페미니즘이 위대한 역사가 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을 텐데 말이다. 특정한 순간을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를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이 ‘위대한 역사’가 되는 것 또한 일종의 역설이다.
허윤 문학연구자·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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