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이 아니다. 섹스에서도 그렇다. 어떤 여성은 남성과 섹스하고, 어떤 여성은 여성과 섹스하며, 어떤 여성은 성별 이분법을 넘어서 섹스하고, 어떤 여성은 섹스 없이도 잘 산다. 성적 지향이 서로 다른 여성들끼리 연대하는 길에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가부장제가 유포하는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의 줄임말) 전술은 물론, 이성애 중심 사회가 부추기는 동성애 혐오가 연대를 어렵게 하는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이루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학자,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에이드리엔 리치는 ‘스물한 편의 사랑 시’에서 여성들이 나누는 사랑을 “어떤 문명도 쉽게 해준 적 없는” “평범함 속의 영웅적인 일”로 그린다.
레즈비언이야말로 여성해방운동의 최전선
미국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1960년대 미국 사회와 운동권 내부에 스며 있던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모두 날카롭게 비판하며 송곳처럼 등장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구호로 강간·낙태 등을 이슈화하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성 상품화를 반대하며 브래지어와 하이힐 등을 불태운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등장한 시기와 맞물린다.
성차별주의자 일각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들에게 “남자를 혐오하는 레즈비언들”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성애 여성에게 레즈비언이라는 호명이 모욕적인 낙인으로 작용하던 시절이었다. 여성운동의 ‘신뢰성’을 우려하던 미국 여성단체 ‘전국여성기구’ 지도부는 1969년 11월 여성단결회의 후원 단체 목록을 담은 보도자료에서 레즈비언 그룹 ‘빌리티스의 딸들’을 삭제해버렸다. 조직 내부의 동성애 혐오를 비판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페미니스트 일부는, 1970년 5월1일 2차 여성단결회의 개막의 밤 행사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기에 이른다.
이날 행사장에 ‘급진레즈비언’(Radicalesbian) 이름으로 배포된 성명서 ‘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Woman-Identified Woman)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역사적 신호탄이 됐다. 이들은 “여성을 줄 세우는 단어이자 꼬리표이자 조건”으로서 레즈비언이라는 ‘낙인’에 담긴 의미를 뒤집어서, 레즈비언이야말로 여성해방 운동의 최전선에서 남성우월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정치적 주체임을 천명한다. 레즈비언이 ‘여성과 섹스하는 여성’이라는 좁은 정의를 넘어서서, 어떤 여성이든 가부장제가 주입한 자기혐오(여성혐오)를 벗어나 다른 여성과 친밀한 관계 맺기를 선택하는 정치운동, 레즈비어니즘으로 확장한 것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은 한국의 레즈비언이자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가 1970년대 미국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치열한 현장에서 탄생한 ‘레전드’ 글 4편을 골라 번역하고 해제를 붙인 책이다. ‘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이 앞서 출간된 다른 책 <페미니즘 선언>(한우리 기획·번역, 현실문화)에 실린 바 있어, 이 선언 뒤 발표되고 사유를 더 확장한 글들을 엮었다. 4편의 글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이라는 같은 우산을 썼지만, 각기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서로 다른 글 4편을 엮었기에, 책은 독자에게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하나의 박제된 이념으로 제시하는 대신, 독자가 네 가지 입장을 비교하며 개입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열어준다.
여성의 유대 경험은 ‘레즈비언 연속체’
샬럿 번치의 ‘반란을 일으키는 레즈비언들’은 ‘여성과 동일시하는 여성’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며 “여성들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문화 속에서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번치를 포함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이성애’가 성관계와 가족제도는 물론, 경제 영역에서도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는 핵심 제도라고 본다. 그래서 레즈비언은 이성애 특권은 물론 경제체제에 저항하는 실천이 된다. “그녀는 남성의 소유물이 되기를, 가사와 양육이라는 무임 노동을 수행하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기본 단위인 핵가족을 거부한다.”
그러나 레즈비언이 마치 ‘페미니즘의 유일한 실천’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일부 조직에서는 이성애 여성, 기혼 여성의 참여 비율을 제한하고 모임에 아들을 데려오지 못하게 하는 등 갈등이 생겼다. 책 <질 오르가슴의 신화>를 써서 유명해진 앤 코트는 이 갈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글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을 썼다. 그는 “페미니즘은 이론이며 레즈비어니즘은 실천”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레즈비언의 의미를 지나치게 이상화·규범화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또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억압자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패권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억압자가 되는 것”이라며,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이 남성이나 여성의 의미를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귀결하는 경향을 우려했다. 앤 코트는 또 ‘여자와 자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여성을 비난하는 일에도 부정적이었다. “페미니즘은 지침이 아닌 선물이며 (누구라도) 여성 개인의 초청이 있을 때만 그녀의 사적인 삶에 개입할 수 있다.”
에이드리엔 리치는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라는 글에서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 여성들끼리 맺어온 유대의 경험을 ‘레즈비언 연속체’라고 이름 붙인다.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성애를 강요받지 않았다면, 다른 여성들과 나눴던 시간을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지 상상하도록 돕는다. “여성이 여성을 향해 열정을 갖고 여성을 동료, 일생의 동반자, 공동체로 선택하는 일의 현실성과 가시성을 부인하는 것”이 ‘강제적 이성애’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모니크 비티그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선언에까지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남성이라는 지배계급의 필요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성애 관계에서 벗어난 레즈비언은 지배관계를 거부하며 탈출한 “도망노예”가 된다.
레즈비언은 탈출한 ‘도망노예’
글쓴이들은 모두 여성해방을 꿈꾸지만, 문제의 인식과 행동 방향은 다르다. 그들이 목표한 세상이 여전히 도래하지 않았기에, 시공간의 차이는 있어도 지금 여기 우리의 고민과 닿은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여적여’ 프레임에 맞서는 ‘여돕여’(여자는 여자가 돕는다) 시대에 읽기 좋은 책이다. “여성, 레즈비언, 혹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격을 검증하고 구분짓는 대신 누구나 자율적으로 자기 자신을 탐색하며 이 운동에 함께할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나영, ‘옮긴이 서문’ 중에서)
김효실 <한겨레> 기자 trans@hani.co.kr
참고 문헌
<페미니즘 선언>, 한우리 기획·번역, 현실문화 펴냄, 2016
<공통 언어를 향한 꿈>, 에이드리엔 리치 지음, 허현숙 옮김, 민음사 펴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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