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1년, 모든 상황 역전시킬 때’
낙태죄 결정 1주년을 앞두고 한 종교언론에서 낸 기사 제목이다.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의 위헌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헌재가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기에, 새로 법을 만들더라도 임신중지(낙태)가 특정 조건 아래서 ‘죄’가 될 여지가 있었다. 일부 종교단체는 이미 “헌재 결정 관계없이” 낙태 반대 운동을 이어간다고 선언했으며, 새로운 법과 제도 마련을 앞둔 보건복지부·법무부·여성가족부 등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낙태 반대 입장을 전달했다. 올해 12월31일로 기한이 정해진 대체 입법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움직임이다.
‘오빠가 허락하는 낙태’를 벗어나기 위해헌재 결정이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 대립 구도를 넘어, 서로 연결된 생명들을 위한 사회 환경을 갖춰야 할 국가의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진전이다. 여성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전은 언제든 “역전”되고 후퇴할 수 있다. 50여 년 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중지가 합법화한 미국에서도,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로를 지켜라’(#ProtectRoe)라는 슬로건을 통해 백래시(반격)에 맞서 싸운다. 시술비 보조 축소, 숙려의무제 등으로 임신중지 접근 장벽을 높이거나 아예 임신중지를 재범죄화하려는 등 판결을 뒤집으려는 ‘입법적 반동’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구성된 21대 국회가 맡을 임신중지 입법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요 대체 입법 대상은 ‘형법상 낙태죄’와 예외로서 인공임신중절 허용 기준을 담은 ‘모자보건법’이다. 낙태죄를 완전하고 전면적으로 폐지할 수 있는 권력, 새 기준을 만들 권력이 국회에 있다. 법을 기한 안에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법안에 진전된 시대정신이 올곧게 담겨야 한다는 점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등에 참여하며 페미니즘과 퀴어, 장애 운동의 관점으로 성과 재생산 권리 운동을 해온 ‘성과재생산포럼’이 기획한 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패러다임을 명쾌하게 제시한 책이다. 활동가, 연구자, 의사, 변호사 등이 참여했다. 헌재 결정 전인 2018년 출간된 책이지만, 낙태죄 폐지 ‘이후’에 필요한 투쟁의 준거점까지 함께 담았다. 이들이 제시한 패러다임 전환 3가지는 국회의 입법 과정을 감시할 때 필요한 ‘관전 포인트’로도 볼 수 있다.
① “낙태에 변명은 필요치 않다”헌재는 여성의 임신 유지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이, 헌법이 보장하는 인격권에 해당한다고 했다. 인격권은 인간이 ‘수단’으로 취급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로서 대우받아야” 하는 권리, 즉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이유림 연구활동가는 과거 주류 여성운동에서 “남성과 국가가 용인하는 낙태 사유”에 더해 ‘사회경제적 사유’ 정도를 추가하려고 한 것을 비판하며, “정치적 도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은 임신중절에 대한 규범화된 ‘성적 각본’의 폐기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관계를) 즐긴 여성’이든 ‘강간 피해자’든, 여성 누구나 이유 불문하고 임신중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출산을 강요받지 않을 기본권이 있다.
백영경 교수는 2016년 이전까지 낙태죄 폐지 운동은 “여성이 왜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변명조의 설명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이제 여성들은 “최소한의 개혁이 아니라 최대한의 지향을 상상하고 외치기 시작”했다고 짚는다. 대체 입법안은 이유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는 ‘사유 방식’과 임신 주수 등 시기를 나누는 ‘기한 방식’으로 나뉠 수 있는데,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 소지가 큰 사유 방식은 지양돼야 할 것이다.
② “내 몸의 주인은 나”로는 충분치 않다필자들은 낙태죄 폐지 운동이 자유주의적 권리 담론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국가가 여성 개인의 ‘선택’이라는 허울뿐인 명분 아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지원 책임을 소홀히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 여성운동에선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권 획득”을 넘어서는 의미의 ‘재생산권’ 개념이 주요 어젠다로 다루어지고 있다. 재생산권은 1994년 국제인구개발회의(ICPD)에서 처음 나와 “외부의 압력 없이 자유롭게 자녀의 수와 터울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재생산 건강권의 의미까지 포함”했다.
백영경 교수는 재생산권의 등장 맥락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제약과 통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였지, 개인주의적 권리를 말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음”을 지적하며, “누가 여성의 몸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고 결정을 하려고 하는가, 그 과정에서 여성들 사이의 차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합법적 낙태’가 일부 여성 집단의 ‘특권’으로 좁혀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여성을 갈라치기하며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는 권력의 생명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③ 인구정책은 성과 재생산 권리 확보를 우선해야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은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출산과 성을 통제하려 한 대표 사례에 불과하다. 필자들은 출산과 보육이 “결국 사회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인구정책 수립과 실천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한국은 국가가 여성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한다기보다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적 전망에 기초한 특정한 방식의 인구정책으로 여성의 몸을 도구화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함께 꿈꿀 만한 미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구정책의 실패를 보여준다”는 것. 이제 인구정책은 ‘여성의 몸’을 도구화해 출산을 통제하려는 계획 대신, 인권으로서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안전하고 즐거운 섹스와 임신중지, 출산, 보육 등은 연속선에 놓이기 때문이다. 임신중지 비범죄화가 새 인구정책을 반영한 법안들과 함께 제시돼야 하는 이유다.
책의 부제는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다. 결국 정치의 문제다. 올해, 우리의 ‘배틀그라운드’ 가운데 하나가 낙태죄를 둘러싼 입법 과정이 될 것은 명백하다. 필자들은 “낙태죄라는 것이 단지 여성의 생애 한 대목에서 일어나는 임신중단이라는 행위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며,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시민 사이의 위계 재생산과 정상적인 삶의 규정을 둘러싼 싸움터였다”고 본다. 그 싸움의 현장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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