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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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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페미니즘을 공격하나

신보수주의의 반격 다룬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
등록 2020-01-25 23:55 수정 2020-05-03 04:29
<백래시>의 저자 수전 팔루디. 한겨레 자료

<백래시>의 저자 수전 팔루디. 한겨레 자료

1980~90년대에 걸쳐 한국의 페미니즘은 빠른 속도로 세를 확장했다. 대학에는 여학생이 증가했고 여성학과가 설치되었다. 문단에는 여성 비평가들이 등장했으며, 취직한 여성이 증가하기도 했다. 사회구조적 변화도 일었다.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특별법 등을 비롯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규제하였으며, 여성부가 설치되어 여성 인권을 증진할 전담 행정기구를 만들었다. 모두가 더 나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반격이 시작됐다. 공론장에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페미니즘의 시대는 가고 다양성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퍼졌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 ‘역차별’과 함께 여성혐오 시대가 도래했다. 여성의 대상화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재미있는 것’과 ‘남자다운 것’으로 유통되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은 여성들이 완전한 평등을 달성했을 때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커졌을 때 터져나왔다. 이는 여성들이 결승선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여성들을 멈춰 세우는 선제공격이다.”

수전 팔루디의 (1991)는 이 선제공격에 관한 보고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격렬하게 진행된 미국의 제2의 물결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진보를 이루었다. 하지만 레이건 정부와 함께 시작된 신보수주의는 약 20년간 미국 사회가 이룩한 진보에 대한 반격이었다. 저널리스트인 팔루디는 자신의 첫 번째 단행본을 통해 언론, 대중매체,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을 상대로 벌어진 공격을 ‘백래시’(반격)라고 명명한다. 이후 이 용어는 사회학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는 출간된 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으며, 미국 페미니스트 잡지 에서 ‘세대를 초월한 논픽션 10권’에 선정되는 등 주목받았다.

사회 진출 여성 공격하던 미국 남성들

팔루디는 안티(Anti·반) 페미니즘의 반격을 살펴보기 위해 신화, 역사, 미디어, 정치, 심리 등 사회·문화 전반을 검토했다. 공론장은 사회에 진출했던 여성들이 오히려 불행해졌다면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생명은 소중하고 가족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말로, 여성의 삶을 출산과 양육, 가사로 한정지었다.

가장 첨예한 대결은 임신중단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여성들의 임신중단을 반대한 것은 백인 저소득층 젊은 남성들이었다. “이런 남성들은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을 위해 울음’을 터뜨린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인생에서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 변화를 겪으며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변화를 독립적인 직장 여성들이 등장한 탓으로 돌리곤 했다.”

팔루디는 경제구조의 전환으로 인해 크게 타격을 받은 생산직 노동자들과 아버지가 누렸던 상대적인 부를 거부당한 젊은 세대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에 열광했다고 지적한다. 젊은 남성들은 임신중단이 가능해짐으로써 여성들이 성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남성들은 여성들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9·11 이후에는 미국이 여성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테러에 공격당한 것이라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는 남성성을 가족을 부양하고 국가를 지키는 것으로 설명하는 ‘전통’과 연결된다. 전통적인 남성 부양자는 거의 사라졌고 ‘남성성’은 쇠락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규범은 강화되고 안티 페미니즘이라는 신화가 생산된다.

페미니즘 공론장 없는 한국

미디어가 유통하고 SNS가 확산시키는 안티 페미니즘의 신화는 2020년 한국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 대중화와 더불어 여성들의 문제의식이 벼려지고, ‘#○○_내_성폭력’과 미투 운동 등 성차별 문제를 사회의 근본 의제로 가져갔다. ‘성상납’ ‘남톡방’, 위계에 의한 성폭력 등 한국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평등 문제의 근간에 젠더가 있다는 고발이 활발해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성평등이나 페미니즘 이슈를 제대로 논의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섣불리 페미니즘을 언급했다간 악플에 시달린다. 2010년대 최대 베스트셀러 을 읽은 여자 아이돌은 안티 페미니즘의 공격을 받았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을 때는 평점 테러가 이어졌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는 것보다 더 빨리 안티 페미니즘이 활성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팔루디는 페미니즘이 손쉬운 타격 대상이라는 점을 꼽는다. ‘자연의 질서’와 ‘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이 모든 남성은 미국 여성운동이 기회만 주어지면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참하게도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건 바로 여성들이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곧바로 낙태 금지 여부를 각 주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발표한다. 자신의 지지층인 보수층에 주는 선물이다. 이는 1990년대 이후 계속된 백래시의 영향이기도 하다. 제2의 물결을 다룬 다큐멘터리 (메리 도어 감독, 2014)에서 1970년대와 2010년대를 이어주는 것은 텍사스의 임신중단 금지 재판이다. 재판을 지켜보던 여성들은 과거 치열하게 싸워서 얻어낸 결과가 뒤집힐지도 모르는 상황을 목도한다. 치열하게 싸웠고, 조금이나마 승리했던 기억 뒤로 거대한 백래시가 펼쳐지는 것이다.

반복되는 반격, 오래된 미래는 바꿔나가야

이러한 상황에도 팔루디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여성들이 무대 위에 등장할 시간은 지나도 한참 지났다. 평등을 향한 미래의 진군을 가로막는 새로운 장애물이 무엇이든, 새롭게 창조된 신화가, 새롭게 부과되는 징벌이 무엇이든, 어떤 기회가 사라지고 삶의 질이 어떤 식으로 하락하든 간에 그 누구도 미국 여성들로부터 대의의 정당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뉴라이트의 보조 집단으로 등장한 우아한 여성들이 알려진 것보다 페미니즘 이슈에 친화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처음으로 연설문을 쓰고, 공청회에 나가서 발언했으며, 정치조직으로 활동했다. 가정에 있을 ‘여성만의 권리’를 주장하던 여성들은 이 권리를 말하기 위해 집 밖에 나섰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팔루디의 다짐에 힘을 실어준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진보와 그에 대한 백래시는 반복되고 있다. 이 오래된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 이제 남은 것은 그뿐이다.

*허윤의 ‘페미니즘 읽는 시간’을 마칩니다. 그동안 애써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김효실 기자가 ‘페미니즘 읽는 시간’ 연재를 이어갑니다.
허윤 문학연구자·부경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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