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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래된 이야기를 하냐고요?”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 다룬 영화 <파도치는 땅>의 85년생 임태규 감독
등록 2019-04-13 11:26 수정 2020-05-03 04:29
4월8일 <한겨레21>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는 임태규 감독.

4월8일 <한겨레21>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는 임태규 감독.

“관객들이 다음 ‘폭력 3부작’ 뭐냐고 물어요. (웃음)”

4월8일 과 만난 임태규(34) 감독은 이제 두 번째 작품을 선보인 독립영화계의 신예다. 그가 4월4일 개봉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 대상을 받은 데뷔작 이 군대 내 폭력의 악순환을 다룬 작품이고, 이번에 선보이는 은 간첩으로 누명을 썼다가 무죄 선고를 받은 1967년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을 통해 국가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두 작품은 우리 사회 폭력의 민낯을 보여준다.

기사 읽다 생긴 관심

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임 감독은 2017년 영화 을 편집할 때 에 실린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 기사(제1149호 표지이야기 ‘낙인’)를 인상 깊게 봤다. 이 기사는 고문 후유증과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온 국가폭력 피해자인 납북 귀환 어민들의 삶을 담았다. “다음에는 사이가 안 좋은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던 때였어요. 마침 에서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으로 피해를 본 할아버지가 무죄판결을 받고 법원 앞에서 울먹거리는 사진을 봤어요. 그걸 보며 그분, 그 가족의 인생이 궁금했어요.”

임 감독은 납북 어민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국가라는 절대 권력이 애국과 안보라는 미명 아래 자행한 폭력에 주목했다. “여러 자료를 찾아봤어요. 한 영상 인터뷰에서 간첩 조작 사건 무죄판결을 받은 분이 ‘앞으로 뭐하고 싶냐’는 질문에 ‘아들이 보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그 말이 잊히지 않더라고요. 그분들의 가족 이야기를 더 찾아봤어요. 간첩 조작 피해자 자식들이 연좌제 때문에 자살하거나, 결혼하거나 직업을 구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오셨어요. 가족관계가 어쩔 수 없이 끊어졌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간첩으로 몰린 아버지 ‘광덕’(전영운)과 그 아버지 때문에 혹독한 인생을 살아온 아들 ‘문성’(박정학)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찍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웠죠.” 배우 등 스태프와 소통하며 작품을 만들어나갔다. 촬영하는 날 2시간 전에 만나 그날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현장에서 대사를 만들어 찍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현실적인 리듬을 따라갔다. 임 감독은 “함께 작업한 이들과 이야기하고 매일 매 순간 영향받고 진행한 촬영”이었단다. 전작 을 찍을 때는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 다 체크하고 동선을 맞추며 하던 모습과는 다르다.

일례로 문성의 아버지 광덕을 돌보는 은혜(이태경)라는 미스터리한 캐릭터를 어느 정도까지 보여줄지 고민이었다. 은혜는 광덕을 ‘빨갱이’로 몰아세운 창진호 선장의 손녀이자 아이를 잃은 엄마로 나온다. “은혜가 왜 문성의 아버지를 돌보는지, 아이가 왜 죽었는지 관객에게 어느 선까지 설명해야 할지를 놓고 배우와 이야기했어요. 은혜가 문성에게 아이가 죽은 이유를 구체적 사건과 함께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억울한 일로 죽었다’고 말해요. 그 말을 들으며 간첩 누명을 썼던 광덕이, 혹은 연좌제로 피해 보고 살아온 문성의 삶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 정도만 이야기한 거죠.”

고통받은 얼굴 대신 쓸쓸한 뒷모습을

주인공 문성 역으로 출연한 배우 박정학씨는 “선배님과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임 감독의 손편지를 받고 이 작품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배우 30년차인 그에게 새롭고 낯선 촬영이었다. 임 감독이 첫 촬영 때 그에게 “연기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역에 푹 빠져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문성’을 보여줄 수 있었단다.

은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는 영화다.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한 광덕이 살아온 고통의 세월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는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광덕의 주치의가 의료기록을 아들 문성에게 보여주며 “예전에 고문당한 흔적”이라고 말할 뿐이다. 카메라가 광덕이 혼자 살아온 방에 있는 화장대에 ‘무죄판결 기념’ 사진과 여러 개의 약 봉지가 놓인 모습을 비춘다. 임 감독은 “상징이 되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 안에서 생각의 여지를 만들고 싶었”단다.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 떨어져 산 아들 문성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에서 문성이 은혜에게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줄 아느냐”고 소리치는 것 말고는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온 고통은 내뱉지 않는다. 대신 쓸쓸한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임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 포스터가 문성의 뒷모습 사진이에요. 몇십 년 떨어져 지낸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긴 장면이에요. 그때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 문성의 얼굴을 찍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와 떨어져 그가 외롭게 서 있는 느낌으로 담고 싶었어요.”

임 감독은 주로 고정된 카메라로 풍경과 인물의 모습을 담았다. 고정 카메라가 움직일 때 감독이 의도한 장면이 나온다. “문성이 아들과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는 장면이 있어요. 그곳에서 간척지 개발로 바다였던 곳이 땅으로 변하고 아파트가 들어선 풍경을 봐요. 카메라가 그 풍경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그 장면으로 제가 영화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우리는 다들 상처가 있잖아요. 그게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일 수도 있고 개인 간 상처일 수도 있고. 그걸 바다를 메운 땅처럼 덮어놓고 모른 척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상처를 들여다보고 긁어 부스럼 만들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세월이 겹겹이 쌓여 어느새 망각하게 돼요. 마치 그곳이 예전에 땅이 아닌 바다였던 걸 까먹는 것처럼.”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아이 엠 제공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독립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아이 엠 제공

세월호 참사도 국가폭력의 아픔 대물림

영화는 땅 아래 일렁이는 두 가지 상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과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게 한다. 영화에서 문성이 세월호 뉴스 영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세월호 유가족과 납북 어민 가족의 모습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화면은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두 사건을 통해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대를 관통하며 그들의 아픔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를요.”

임 감독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 같은) 오래된 이야기를 굳이 뭐하러 시작했느냐고 물어요. 그들이 보기엔 30대인 제가 관심 둘 주제는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저는 말해요. ‘지금도 그 사건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왜 그게 오래된 이야기인가요?’라고. 계속 국가폭력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고 그 피해자뿐 아니라 가족, 그 옆에 있는 사람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모두 그 피해의 영향 아래 살고 있어요.”

영화는 상처와 더불어 희망도 이야기한다. 문성의 아들 도진(맹세창)이 사랑하는 윤아(양조아)의 딸이 그 희망의 상징이다. “문성은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요. 아들이 그가 원하는 유학 공부를 중단하고 아이가 있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해요. 그런 아들과 틀어진 관계를 풀어줄 여지를 남기며 영화가 끝나요. 윤아의 딸을 보며 웃는 문성의 표정에서 그 가능성을 보여줘요. 아이에게 앞으로 이들 부자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거죠.”

임 감독은 영화 찍을 때 되뇌는 말이 있다. “이 영화 한 편을 위해 죽을 것처럼 찍지 말자”는 것이다. “저는 영화를 찍는 사람이지만 그 전에 개인적인 제 인생도 있잖아요. 그걸 다 버리고 영화에 모든 걸 걸진 말아야죠. 영화 한 편 찍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영화 작업을 하면 힘들 때도 있고 버티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영화보다 먼저는 제가 잘 사는 거예요.” 그런 다짐 역시 그가 “영화를 오래 많이 찍기” 위해서다.

“죽을 것처럼” 영화 찍지 않는 독립영화 감독

임 감독은 영화로 찍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중 “억울한 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고 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창작의 원동력은 “사회 불만”이라고 말한다. 그 불만의 정체는 이런 거다. “사회정치적 문제를 설명해주고 그 문제를 개인 탓으로 몰아가지 않는 게 좋은 사회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각 개인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게 만들어요.”

불만을 원동력 삼아 그는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한다. 장르는 “누아르 영화”다. “폭력 3부작은 아니고요. (웃음) 무국적자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20대 청년의 이야기예요. 청년의 직업은 성매매 여성을 연결하는 브로커입니다.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일단 여기까지요.”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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