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그 어떤 권위의 힘도 빌리지 않기. 칭찬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기. 더 멋지고 대단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타인의 말을 인용하지 않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 내 나이 마흔의 힘이었다.” ( 중에서)
사회적 자아를 벗고 진짜 나를 찾아서마흔은 ‘사추기’(思秋期)라고 불리는 중년기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이 시기를 “인생의 정오”라고 표현한다. 외형적인 것에 치중했던 삶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 자신의 욕구에 대한 강렬한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동안 발달시켜온 사회적 자아를 벗고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한 혼란기’를 경험한다는 얘기다. 마흔을 맞기 위한 ‘마흔앓이’를 한다.
이 마흔을 맞은 사람들, 이 시대의 중년은 어떤 ‘마흔앓이’를 하고 있을까. 11월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북카페에서 책 를 펴낸 정여울(41) 작가와 김영석(41)씨, 이은정(40)씨, 조영선(41)씨가 ‘내 나이 마흔’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시대를 경험한 ‘마흔들’은 감정 변화, 나이 듦, 트라우마, 추억 등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 이날 40대라는 공통점으로 처음 만난 이들의 ‘마흔 토크’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마흔을 ‘불혹’이라 하거나 ‘중년의 위기’라고들 합니다. 실제 내가 맞은 마흔은 어떠한가요.
정여울(이하 정) 중년의 위기라고 하지만 난 마흔인 지금이 20대, 30대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막연히 마흔이 무척 늙은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겪으니 그렇지 않던데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40대 삶이 과거와 다를 수도 있어요. (데이비드 베인브리지 지음)이라는 책에서 중년은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독특한 시기라고 하잖아요. 중년은 인간이 발명하고 재발견하는 특별한 나이에요.
김영석(이하 김) 이제 민방위 훈련 통지서를 받지 않으니 ‘나도 이제 40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방위 훈련받는 나이가 만 40살까지예요. 전쟁이 나도 나는 동원되지 않는구나 생각하니 상실감이 밀려왔어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를 찾는 소중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30대와 다른 삶을 살고 있거든요. 직장생활을 10년 하고 나왔어요. 결정적 계기가 있었죠. 어느 날 회식하고 집으로 가는 직장 상사의 뒷모습을 봤어요. 무척 쓸쓸했어요. ‘내가 직장에서 고속 승진을 하고 잘나가도 저 사람밖에 안 되겠구나. 그런 삶을 살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가슴속에 묻어둔 작가라는 꿈이 생각났어요. ‘내가 원하는 글 쓰는 삶을 살자’라며 사표를 냈어요.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써온 글을 모아 이북(전자책)으로 냈어요.
이은정(이하 이) 20대에는 젊은 에너지 때문인지 무서운 게 없고 뭐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이제 마흔이 되니 두려운 게 많아요. 뭔가 공허하고 길을 잃은 느낌도 들고요. 난 언제쯤 편안해질까 그런 생각도 문득문득 드네요.
조영선(이하 조)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니 ‘마흔이 다 같은 마흔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남편과 둘만 있으니 아이를 키우는 마흔과 또 다른 것 같아요. 우리는 단일하지 않고 나이로 규정할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첫 세대가 아닐까요.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10대 때는 주변에서 강제한 삶을 살고, 20대 때는 그 강제한 것이 내면화돼 나 자신을 쥐고 흔들었어요. 혼란스러운 시절을 겪고 맞이한 마흔은 그동안 살아온 삶의 껍질을 벗는 단계 같아요.
정 마흔이 되면서 내가 행복한 순간을 발견했어요. 올해 내 책의 독자들과 유럽으로 글쓰기 여행을 갔어요. 그때 참여한 분들이 잠도 안 자고 글을 쓰는 나에게 힘들지 않냐고 했어요. 그 물음에 ‘글을 못 쓰면 더 힘들 것 같다’고 답했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에요. 글 쓰는 게 내 블리스(더없는 행복)라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그 정도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이 행복한 순간을 발견하면 무척 기쁠 것 같아요. 제가 삶이 허전하다고 느끼는 건 그걸 찾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20대 때부터 정치학을 공부하고 뒤늦게 박사 학위도 받았어요. 지금까지 정치학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이걸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워요. 그것 말고 제가 행복한 순간은 강의를 할 때인 것 같아요. 학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희열이 막 느껴져요. 강의하고 나오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정 은정씨는 정치학 공부보다 학생들과 교감 나누는 강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지금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즐거워하는 걸 찾을 수 있을까예요. 평생 못 찾으면 어떡하지 걱정되고요. 요즘엔 자신의 꿈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부러워요.
아이를 낳아야 철든다?정 명확한 척하는 사람도 많아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아닐 수도 있고요. 남들에게 잘 보이려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내가 좋아한 게 뭘까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해요. 에고(의식적 자아)보다 셀프(내면적 자기)에 더 물을 주고 있어요. 셀프가 더 나다운 것이니까요.
조 의미로 감춰진 삶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아직도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김 확실히 저희 부모 세대와 다른 중년을 맞고 있는 것 같아요. 여자친구가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이에요. 부모가 되지 않은 중년이죠. 주변 제 또래는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을 시기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열심히 생각해요.
조 저도 부모가 되지 않은 중년이에요. 주변에서는 ‘아이를 낳아야 철든다’고 하지만 그 말은 맞지 않아요. 아이가 있느냐 없느냐가 성장의 요건은 아니죠. 자기 삶을 성찰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죠.
정 주변에서 받는 ‘피어 프레셔’(동료 집단이 주는 사회적 압력)가 많아요.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관건인 것 같아요. 인생에서 자기결정권을 갖는 게 중요해요. 내가 결정한 일이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책임을 지는 능력도 키우고요.
“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두 번째 스물’ ‘두 번째 사춘기’라는 마흔이 되면서 어떤 변화를 느끼나요.정 예전보다 글 쓸 때 자기 검열을 적게 하고 과감해졌어요. 부모님, 상처 등 사적인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써요. 마흔의 힘인 것 같아요. 내 상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독자도 자신에게 비슷한 고민이 있다고 말을 걸어와요. 이제 악성 댓글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상처받을, 비판받을 용기가 생긴 거죠. 이게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치이고 비판을 받으며 얻은 거예요.
김 맞아요. 날 지키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해요. 다들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그게 대부분 어린 시절에 생겨요. 그 어린 시절의 아픈 나를 마주할 수 있게 됐어요. 쉽게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와 화해하고 손잡는 걸 하고 있어요. 마흔 이후부터요.
정 ‘내면 아이’(한 개인의 인생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와 대화를 시작하는 거예요. 저도 그걸 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왕따를 당했어요. 소심한 성격이 그때의 영향인 것 같아요. 담임선생님이 ‘일진’처럼 나를 괴롭히고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괴롭혔어요. 부모님에게 이야기도 못했어요. 그땐 극단적 생각까지 했어요. 성인이 돼서도 왕따에 관한 기사를 보면 너무 슬프고 힘들었어요. 왕따당한 아이가 어릴 적 나 같아서요. 그런데도 남들에게 왕따당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그걸 망각한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도 치유되지 않은 채 담아둔 거였죠. 그 상처를 이야기해야 치유가 되는 거였어요. 내면 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상처도 많이 치유됐어요.
조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학생들에게서 내 학창 시절 모습을 봐요. 친구들 사이의 질투, 편 가르기를 보며 ‘나도 그땐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땐 그런 친구들 관계 때문에 힘들어 죽을 것 같았거든요.
김 전 마흔이 되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았어요. 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우사 청소하는 봉사까지 하고 있어요. 냄새나는데도 할 만해요. 동물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동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존재 자체로 나에게 기쁨을 줘요. 예전부터 좋아하는 건 영화 보기예요. 다들 시네코아(1997년 개관해 2006년 폐관한 극장) 아세요? 거기 모니터링 회원이었어요. (웃음)
조 아, 시네코아!
정 30대도 잘 모르죠, 시네코아.
김 거기도 자주 가고 비디오방도 갔죠.
정 나도요. 대학원 시절 때까지 우울하면 비디오방에 갔어요.
김 나도 그랬어요. 비디오방에서 슬픈 영화를 보면 마음이 개운해졌어요. 이제는 비디오방 없어요. 멀티방이 생겼어요.
정 멀티방이라, 정감이 없네요. 우리가 가면 안 될 것 같고.
김 우리 진짜 40대 맞네요.
조 오, 동질감!
(모두 웃음)
살아온 만큼이나 남아 있는 나머지 절반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정 앞으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난 니체의 사상 중 ‘아모르 파티’(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를 생각하며 살아갈 거예요. 불완전하고 좌충우돌하는 내 모습 그대로 사랑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모르 파티 아닐까요.
김 예전에는 바다를 건너려면 배만 잘 만들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배를 띄우는 것도 물이요, 배를 뒤집는 것도 물이에요. 그 물을 제가 통제할 수 없었어요. 그 물처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을 탓하지 않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흔이 되니 그렇게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이제는 여유를 갖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고 싶어요.
불완전하고 좌충우돌 그대로 ‘아모르 파티’이 그동안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 말을 제일 듣기 싫었어요. 내 단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민한 나는 남을 배려하는 섬세함도 지니고 있거든요. 예민한 내 모습까지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이제 그걸 시작했어요.
정 책 가 나온 뒤 처음으로 날 다독여주고 칭찬했어요. 예전에는 그런 걸 못했어요. 마흔 되니 그게 되네요. (웃음) 은정씨도 그 배려심으로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노력했잖아요. 그거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잘해왔잖아요, 우리. 이제부터 아모르 파티를 시작해야죠!
사회·정리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중년의 마음을 기록한 에세이부터 문화인류학 분석서까지
마흔에게 권하는 책
를 펴낸 기시미 이치로가 쓴 (다산초당 펴냄)는 중년 예찬서다. 지은이가 심장 수술을 위해 잠시 심장을 멈춰야 했던 힘든 시기를 지나며 쓴 책이다. 중년이 되어 느끼는 기쁨에 방점을 찍는다. “젊은 시절에 공부를 하면 경쟁에 내몰리거나 결과를 내라고 독촉받게 됩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면 평가나 평판에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배우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중년의 배움은 위기를 성장으로 이끄는 ‘개성화’의 과정이다.
(청림출판 펴냄)을 쓴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데이비드 베인브리지는 중년에 대해 “인간만이 가진 가장 독특한 삶의 중반부”라고 한다. 이 시기는 단순히 늙어가는 단계가 아니라 정신적·육체적·사회적 세계가 또 한번 변화하는 특별한 삶의 국면에 들어서는 단계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인간이 맞이한 중년이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쳐 얻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는 달리 생식 활동이 끝난 뒤에도 40살 이상 살 수 있는 ‘중년 유전자’를 지녔다”며 “이 유전자가 진화해 오늘날의 지혜롭고 여유로운 중년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오늘날의 중년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보낸다. “원한다면 젊은 외모를 지키려고 애쓰고, 젊었을 때 못해봐서 아쉬운 짓도 저질러라. 우리에게는 즐거운 일을 할 시간과 지혜가 있다. 우리는 중년이 되기에 가장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 행운아들이다.”
융 심리학을 바탕으로 마흔 이후의 삶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도 있다. (제임스 홀리스 지음, 더퀘스트 펴냄)이다. 이 책은 중년의 시기를 “중간 항로”라 정의한다. “중간 항로는 1차 성인기라는 확장된 사춘기와 피할 수 없는 노년과 죽음 사이에서 한 인격을 재정의하고 전환할 수 있는 기회이자 통과의례다.” 자신의 잠재력을 깨우고 나이 듦에서 나오는 생명의 힘과 현명함을 얻어내려면 중간 항로를 지나야 한다고 말한다.
(김정희 지음, 북씽크 펴냄)은 마흔에게 ‘지금까지 당신은 누구의 삶을 살아왔는가’라고 질문하는 책이다. 생애 전환기인 마흔에 “마음 검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은이는 “이 시점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챙기고 갈 것인가의 준비만 남았다”고 이야기한다.
(리처드 J. 라이더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은 인생이란 다르게 해석하면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인생의 유연함을 말한다. 인생 절반쯤 왔을 때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중년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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