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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헤롯, 여자 햄릿 젠더프리 캐스팅

#미투가 뮤지컬을 만났을 때
등록 2018-11-15 09:37 수정 2020-05-03 04:29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헤롯 역을 맡았던 김영주 배우. 클립서비스 제공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헤롯 역을 맡았던 김영주 배우. 클립서비스 제공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메리앤 엘리엇 연출)는 주인공으로 여성 바비(Bobbie)를 내세웠다. 1970년 초연한 는 미국 뉴욕에 사는 35살 인텔리 남성 바비(Bobby)와 그의 다섯 친구 커플을 통해 복잡한 대도시에서 결혼과 관계 맺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는 현대사회에서 인간관계라는 문제의식은 같지만 여성 관점에서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 이처럼 최근 공연계에는 성을 뒤바꾸는 ‘젠더벤딩’이나 성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하는 ‘젠더프리’ 공연이 늘어나고 있다.

아름다운 헬레네, 김준수
남성으로 설정된 배역을 여성으로 바꾼 ‘젠더벤딩’ <컴퍼니> Brinkhoff Mögenburh

남성으로 설정된 배역을 여성으로 바꾼 ‘젠더벤딩’ <컴퍼니> Brinkhoff Mögenburh

국내 공연계에서도 이 흐름이 두드러진다. 뮤지컬 에선 시간여행을 하는 월하노인 역에 여성인 구원영과 남성인 김호영·이석훈을 캐스팅했다. 11월 공연을 앞둔 의 신적인 존재 X 역이나, 얼마 전 끝난 의 콜롬비아 역에도 남성과 여성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했다. 권위적인 평론가와 작가의 대립과 갈등을 그린 연극 에선 남성 배역에 여성 배우를 출연시키기도 했다. 트로이전쟁 속에 희생되고 고통받는 여인들의 관점에서 재창조한 창극 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 역은 남성 배우 김준수가 연기했다.

<광화문연가> 월하노인의 구원영 배우 CJ E&M 제공

<광화문연가> 월하노인의 구원영 배우 CJ E&M 제공

성역할을 바꾸거나 무성의 캐릭터에 다른 성의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는 작품이 늘어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큰 진양을 일으킨 ‘미투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공연계에도 깊이 뿌리박힌 성 불평등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 아마존에서는 인공지능 채용 프로그램 개발 계획을 철회했다. 인공지능이 채용에서 여성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기존 데이터를 딥러닝 방식으로 반복 학습해 결과를 끌어내는 인공지능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마저 압축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공연 분야 역시 이 사회상을 반영해왔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은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강화했으며, 공연계 역시 ‘유리천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주요 배역에서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여성 배우가 중요한 배역을 맡을 기회가 그만큼 적었다. 영국에선 올해 성평등 캐스팅을 위한 프로그램 ‘네로파’(Neutral Roles Parity)가 등장했다. 대본을 분석해 캐릭터를 남성, 여성, 중립으로 분석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 중립에 해당하는 역할조차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는 인식에서 시작됐다. 굳이 남성이 맡지 않아도 될 역할을 그동안 남성 캐릭터로 고정됐다는 것이다. 젠더벤딩이나 젠더프리는 남녀 간 그릇된 편견과 인식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실질적으로 여성 배우들이 참여할 기회를 늘려주는 구실을 한다.

2015년 뮤지컬 의 헤롯 역을 김영주가 맡았다. 최근 젠더프리 캐스팅을 자주 시도하는 이지나 연출가의 작품이었다. 이 연출가는 당시 인터뷰에서 “헤롯왕은 정치적이고 교활한 역할로 성별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역할”이라며 그 캐릭터에 부합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이지만 여성을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작품에서 단 한 장면 나오는 헤롯 역은 쇼스타퍼(명연기)로서 코미디언이나 헤비메탈 그룹의 로커가 맡는 등 특색 있는 캐스팅이 돼왔다. 여성 캐스팅 역시 그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연출가는 최근 의 월하노인이나 의 X 역에 젠더프리 캐스팅을 했다. 이런 캐스팅이 여성 배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면서도 “꼭 성이 필요한 역할이 아니라면 가능하다. 명확한 실존 인물일 경우 젠더프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그의 젠더프리 캐스팅 철학을 밝혔다.

성별 무의미한데도 남성이 주인공
성중립적 역할에 여성을 캐스팅한 연극 <비평가>. K아트플래닛 제공

성중립적 역할에 여성을 캐스팅한 연극 <비평가>. K아트플래닛 제공

앞서 말한 네로파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작품 속 캐릭터 중에는 성별이 무의미한 중성적인 캐릭터를 많이 만난다. 남성적 캐릭터라 하더라도 성을 바꾼 캐스팅으로 새로운 극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에서 브루투스에게 행동할 것을 설득하는 카시우스는 적극적이고 끝까지 저항하는 인물이다. 영국의 연출가 니컬러스 하이트너는 를 현대적인 정치 대결 과정으로 풀어내면서 카시우스 역을 여성 배우에게 맡겼다. 정치판에 여성의 자리를 부여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카시우스를 여성 정치인으로 바꿈으로써 기존 작품에선 느끼지 못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관계에 정치적 동지를 넘어선 특별한 감정을 부여한다.

메리앤의 처럼 남성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는 젠더벤딩은 여성의 시각으로 작품에 새롭게 접근한다. 햄릿을 21세기 대한민국 재벌 딸로 설정을 바꾼 연극 은 햄릿의 고민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한계를 더한다. 이처럼 캐릭터의 성을 바꾸는 젠더벤딩뿐 아니라 캐릭터의 성은 그대로 두되 남성 캐릭터에 여성 배우를 출연시키는 방식도 시도되고 있다. 창극 의 헬레네나 의 제갈공명, 주유 등 주요 배역을 여성 배우가 맡았다. 연극 역시 원작이나 국내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선 여성 배우들의 2인극으로 끌어갔다. 젠더프리의 방식은 같지만 작품에서 발휘하는 효과는 다르다.

배우들이 비슷한 의상을 입고 나온 음악극 은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는 데 별다른 이물감을 주지 않는다. 원작의 판소리 자체가 소리꾼 한 명이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역할을 바꾸는 장르이기도 하거니와, 소리를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가다보니 극 자체를 연극놀이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창극 에서 헬레네의 경우는 젠더프리 효과가 두드러진다. 남성들의 전쟁으로 인한 여성들의 희생을 다룬 작품에서 트로이전쟁의 원인 제공자이자 가장 아름다운 여성 헬레네를 남성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아름다움이라는 또 다른 권력을 가진 여성이자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라는 점이 연극적 방식으로 두드러졌다.

연극 는 주도권을 쥔 비평가와 작가의 지적 대결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대사가 자주 나오는데 여성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이들의 권위적 태도의 부당함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의 이영석 연출가는 여성 배우에게 지적 논쟁을 벌이는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며 왜곡된 인식을 상대화해 바라보기 위해 젠더벤딩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더 나은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

여성 바비로 바꾼 의 메리앤 엘리엇 연출가는 자신의 작품이 기존 작품보다 더 나은 게 아니라 다른 작품이라며 젠더벤딩의 효과를 설명했다. 이러한 캐스팅이 작품과 잘 어울렸을 때는 의 경우처럼 작품의 메시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부각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젠더프리나 젠더벤딩은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의 권위가 기울어진 시대에선 작품이 지닌 담론에 새로운 담론을 추가하며 의미를 풍부히 한다.

박병성 뮤지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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