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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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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무시할까 두려운가

타인을 인정욕구의 도구로 삼았던 날들에 대하여
등록 2018-11-06 12:55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아버님 어쩌죠?” 문화방송(MBC) 시트콤 에서 이순재의 사위 정보석은 이 말을 달고 산다. 장인 회사에서 겨우 한자리 차지하고 눈칫밥으로 사는 이 사람이, 가족 엠티(MT)라도 준비하면 대형 참사가 벌어진다. 경기도 광주로 가야 하는데 광주광역시로 가고, 그가 예약한 펜션에는 부엌이 없고, 불을 피우려니 라이터가 없고, 서울로 돌아가려니 기름이 없고, 주유소까지 걸어 휘발유를 사오니 경유차고, 너무 추워 신문지에 불을 붙이니 산불이 난다. 그러니 온 식구에게 찬밥이다. 장인의 인정을 받아보려 발버둥 치지만 돌아오는 건 “이 자식이!”라는 소리뿐이다.

너마저 나를 무시할 순 없다

정보석은 딱 하나 못 참는다. 신세경의 눈빛이다. 신세경은 아버지가 빚더미에 올라 동생과 순재네에 얹혀사는 가정부다. 세경이 별말 한 것도 아니다. 정보석이 계산을 잘못한 걸 순재 앞에서 바로잡았을 뿐이다. “아닌데요.” 이 한마디에 정보석은 모멸감을 느낀다. “소파 아래는 왜 안 닦냐”며 치졸하게 꼬투리를 잡아댄다. 부인, 처남, 딸까지 자신에게 함부로 해도 이 집안 위계에서 가장 아래층에 놓인 ‘가정부 너마저’ 그럴 수는 없는 거다. ‘무시’는 누가 하고 있는 걸까? 순재의 질서가 지배하는 이 집에서 정보석을 놀려대는 건 순재지만, 정보석은 거기에 소심한 ‘이불 킥’조차 하지 않는다.

10년 전 시트콤인데 아직도 정보석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저 찌질한 인간….’ 킥킥거리고 보다, 뒷골이 서늘했다. 어디서 많이 본 인간이다. 나다. ‘무시병’ 중증이다. 혹시라도 남들이 무시할까봐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있다. 눈빛, 낱말 하나만으로도 경보가 울린다. 오작동 따위 생각할 시간 없다. 1초 만에 공격 또는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회사 후배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이 친구가 딴청이다. ‘어 인사를 안 해?’ 엘리베이터가 5층까지 올라가는 사이 분노 게이지가 급상승했다. 마음속 ‘데스노트’에 꼭꼭 눌러쓴다. ‘잊지 않겠다.’ 회사에서 뒷방 차지가 될 것 같은 불안이 커질수록 분노는 광속으로 솟구쳤다. ‘후배 너마저’ 그럴 수는 없는 거다. ‘무시’는 누가 했던가? 줄 세우기는 누가 하고 있나? 내가 후배에게서 본 건, 그의 무시인가 나를 향한 내 시선인가?

현민이 쓴 (돌베개 펴냄)은 병역거부로 1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작가의 수형 생활 기록이다. 자신과 감옥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기다. 현민과 같은 방을 쓰는 광천은 감옥 권력자 ‘빵잡이’다. ‘빵잡이 형님’들은 ‘동생’들을 거느린다. 광천은 20대 초반에 수감돼 10년 넘게 징역을 사는데,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근육을 꾸준히 키운다. 밤에 책을 읽는다. 사업 계획을 세운다. 감옥에서 나가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 거라 믿는다. 그런데 광천은 사실 알고 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10년 넘게 마트에 가본 적도 없다는 걸 말이다. 그 환상과 실제 사이에 놓인 간극의 심연은 때로 그의 멍한 눈빛으로 드러난다. 멍한 눈빛은 ‘동생’들에게는 경고 사인이다. 폭력의 전조다.

자본도 경험도 없는 광천이 현민에게 사업 계획서를 봐달라고 내밀었다. 현민은 우물쭈물했다. 말을 골랐다. 시장 개척은 어떻게 할 건지 물었다. 그때 광천의 눈망울이 또 멍해졌다. 증오와 복수로 돌진하는 터널이 됐다. “나도 배울 만큼 배웠어!” 광천은 현민의 머뭇거림을 무시로 읽었다. “자기 안의 분열을 외부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으로 바꿔놓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해야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를 확인해줘야 하는 건 동생들의 의무다. 충성을 바치는 노예이자 사랑을 주는 애인의 모순된 역할을 부여받는다.

타인에겐 불가능한 과제

광천은 때리며 사랑해달라 말한다. 지배하며 의존한다. 현민이 같은 방에 배정받자 “밤에 부스럭거리지 마라”는 둥 통제한다. 그런 통제로 권력을 확인하고는 반바지를 줬다 뺐거나 이불을 마음대로 꿰매거나 하며, 현민이 바라지도 않는 친절을 베풀고 거기에 따른 감정적 보상을 강요한다. 광천에게 현민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현민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현민에게 의존하기에 더 힘으로 통제하려고 한다. “광천이 악하다면 그에겐 타인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해주는 타인이라는, 불가능한 과제를 감옥에서 추구하기 때문에 동생이 희생양이 된다. 이것이 정녕 악이라면 ‘악’을 쓰다, ‘악’에 받치다 정도가 적확한 용법이겠다. 이 악에 비극이 내포되어 있다면 나약한 인간이 발‘악’하면서 변모하는 과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나를 무시하고 있나? 아닌가? 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부터 따지고 들었다. 분류는 초 단위로 계속된다. 이 칸에 넣었다 저 칸에 넣었다, 혼자 머릿속이 바쁘다. 그러느라 정작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 장인 회사 부사장인 정보석이, 낮에 일하고 밤에 검정고시 준비하며 창고 방에서 더부살이하는 신세경의 신산한 삶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항상 타인에게 촉수가 서 있지만, 정작 궁금한 건 그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비친 나이다. 그 사람에게 비친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타인은 그저 거울이자 내 존재를 확인해주는 도구로 전락한다.

텅 빈 마음을 채우는 건 타인의 질서다. 저 사람이 날 무시하나 의심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직급, 상사의 인정, 집의 평수, 학교 성적, ‘정상’ 가족? 정보석이 이순재의 질서에 맞춰 살며 이를 기준으로 신세경을, 또 자신을 보듯 나도 그렇다. 내가 원했던 기준인가? 그런 거 따질 국면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석이 이 집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 두렵듯, 모멸의 눈빛만으로도 내 존재가 사라질 것처럼 두려웠다.

이제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낮은 자존감의 기반과 동력은 자신감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공포에서 탈출하는 것이 기본 목표이다. 그들이 타인에게서 찾은 것은 진정한 소통을 경험할 기회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는 기대와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보살펴주겠다는 약속이다.”( 너새니얼 브랜든 지음, 교양인 펴냄)

40년 넘게 내가 본 것은 나를 무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앙상한 허상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제라도 물어야 한다. “어쩌죠? 어떻게 할 거죠?” “아버님”이 아니라 나에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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