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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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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하루키였는데 실상은 동네 백수

퇴사의 단점은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
등록 2018-10-13 18:05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상상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는데, 실상은 동네 백수다. 기사를 보면, 하루키는 날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 달리고, 일을 시작해 원고지 20장을 쓴 뒤 오후엔 음악을 듣거나 좋아하는 걸 하다 밤 9시면 잔다. 1년에 한 번 마라톤 풀코스를 뛴다. 장강명 작가는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가며 날마다 8시간씩 일한단다.

일곱 달 전 회사를 그만두고 24시간이 내 손안에 쥐어졌을 때, 그런 꿈을 꿨다. 회사가 일어날 시간, 밥 먹을 시간, 일할 시간을 정해주는 삶이 얼마나 내 것 같지 않았나. 그런데 24시간이 주어진 지금, 이 삶이 내 것 같지 않다. 액체괴물처럼 침대에 눌어붙어 있다. 내가 내 맘대로 안 된다. 남이지 싶다.

‘미쳤냐?’ 대체 어쩌다 인터넷에서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스의 딸 수리 크루즈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뭔가를 검색하려고 들어갔다가 실시간 검색어에서 김태리를 봤던 거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수리 많이 컸네’ 하고 있다. 하루 필요 인간 접촉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다보니, 에스엔에스(SNS)를 헤맨다. 남의 일상을 보는 걸로 내 일상을 채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페이스북 없는 삶을 실험하겠다”고 페이스북에 공언했다. 무인도 같다. 딱 이틀 갔다. 광속도로 돌아온 게 창피해서 ‘좋아요’도 못 누른다.

퇴사의 큰 단점은 하루가 엉망진창으로 녹아내릴 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말을 몇 시간 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회의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일 시킨다고 욕할 상사도 없다. 빼도 박도 못하는 내 탓이다. 내 통제를 벗어난 나를 보고 있자면, 불안의 너울이 덮친다.

세상이 왜 이토록 두려울까? ‘불확실함’은 삶의 디폴트(초기화) 상태다. 그 바다에 떠가는 ‘나’를 놓쳤다고 느끼니 무섭다. 자존감이 만병통치약처럼 통하기에 관련 책을 몇 권 봤는데, 그때뿐이었다. 책 보고 근육을 키우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마돈나 팔을 갖고 싶다면, 아령을 들어야 한다. 자존감을 40년간 연구한 너새니얼 브랜든은 에서 이렇게 썼다. “부모의 행동이 아이의 심리적 발달을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자기 의지에 따라 사고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평생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그리고 어느 수준의 자존감을 성취할지 스스로 선택한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든’ 게 아니고 완벽한 부모는 애초에 있을 수 없기에 신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음속에 ‘우는 아이’가 없는 사람은 없다. 지금 그 아이를 보듬을 구원자는 자신밖에 없다. 두려운 자유이기도 하다. 기다릴 문제가 아니라 행할 문제이니까.

어떻게? 너새니얼 브랜든은 자존감을 자신이 삶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자기 효능감과 행복하게 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믿는 자기 존중으로 해석하고, 이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여섯 기둥을 제시한다. 한 개도 어려운데 여섯 개다.

첫 기둥은 의식하며 살기다. 사실과 내 해석, 거기서 이는 감정을 구분한다. 내 가치와 목표를 알고 지금 이 순간 행동이 거기 부합하는지 의식한다. 내 욕구와 열망, 몸의 감각,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 깊숙한 상처의 휘둘림을 알아차린다. 첫 단계부터 난관이다. 나를 보면, 타인의 외면을 나를 향한 무시로 해석해 머리끄덩이 잡겠다고 덤비는 데 걸리는 시간, 1초도 안 된다.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의식적이고자 하는 진실한 의도가” 관건이란다.

하여간 두 번째 기둥, 자기 받아들이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내 존재 권리를 옹호하기로 선택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내 감정을 받아들이고, 행동의 내적 동기를 이해한다. 우리가 부모에게 바라는 바로 그것을 자신에게 해준다. 침대 커버가 돼가는 나를 어떻게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인단 말인가? “받아들임이 반드시 좋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받아들임은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사실을 사실로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피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세 번째 기둥, 자기 책임지기다. 내 욕구, 행동, 관계, 태도, 행복, 삶의 가치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진다.

네 번째 기둥은 자기 주장하기다. “혼자 서겠다는 의지, 솔직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존중하겠다는 의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표현하려는 의지”다.

다섯 번째는 목적에 집중하기. 스스로 선택한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여섯 번째는 자아 통합하기. 이상과 실천, 말과 행동 일치하기다. “위선과 부정직을 택할 때 거기에 따르는 결과와 자존감이 치르는 대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데서 수많은 삶의 비극이 벌어진다.”

자기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자기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행동하라는 이야기인데, 가능할까? 내가 누군가를 욕하는 까닭은, 내 안에 숨기고 싶은 바로 그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갈망하는 것은 실은 당신이 아니라 불안에서 나를 구원해줄 사람,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내 행복을 책임지기 두려워 당신을 비난했다고. 그 수많은 거짓말을 거둬내고, 나를 마주 보고도 안아줄 수 있을까?

대기업에 다니며 딸을 키우는 친구는 날마다 “쫓기는 기분”이라고 한다. 쉴 시간 없는 대신 월급이 들어오니, 쉬는 시간만 있고 통장은 비어가는 나랑은 반대 상황인데, 그 또한 “불안하다”고 했다. “죽는 날, 이 모든 발버둥이 결국 아무 의미 없었다고 한탄하게 될까 두려워.” 자기라는 조정키를 잡고, 자기가 정한 의미를 향해 가는 것 말고, 불안과 공포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나보다.

그래, 따뜻한 사람이 되자. 동네 불우이웃 돕기 모임에 두 달 전 가입했는데 만나면 부대찌개만 먹는다. 라면 사리를 많이 넣어 먹는다. 불우 이웃은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 상처에 휘둘리지 말자. 명상하려고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 자꾸 화장실에 가고 싶다. 그래, 타인에게 화풀이하지 말자, 어느 참엔가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있다. 그래도 여기 있지 않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디론가 향하려는 내가 있지 않나. 그렇다고 쓰려고 페이스북에 로그인을 하고 있다. 오늘만 백 번째 로그인.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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