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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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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디아스포라

에어컨 없는 집에 가기 두려워 떠도는 사람들

더위 고통에 공감하며 친해지는 진귀한 경험
등록 2018-08-30 15:26 수정 2020-05-02 19:29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얀 마텔의 와 윌리엄 어니스트 보우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에어컨이 없다. 낡은 선풍기는 켜면 비행기 소리를 내는데 바람은 더운 휘파람이다. ‘여기는 비행기 1등석이다.’ 최면을 걸어 자보려 버둥거렸다. 등에 땀이 배어 다섯 시면 깼다. 누가 기내식은 안 줄까. 가스레인지 트는 게 두려워 식빵으로 때웠다. 배가 고프니 바닥에서 등을 떼기 더 힘들었다. 에어컨을 지를까 하다 월급도 안 들어오는데 한두 달 더 버티자 싶었다.

폭염 디아스포라였다. 집으로 돌아가기가 두려웠다. 도서관에 이렇게 오래 있어본 것도 오랜만이다. 책이 아니라 에어컨이 목적이다. 옆 사람은 뜨개질하고, 그 옆 사람은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보고 있다. 어느 안방에 둘러앉은 가족 같았다. TV만 들여놓으면 진짜 가족이 될 텐데. 부모님은 흩어져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떠돈다고 했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시원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궁리했다. 정수리에 아이스팩 하나 이고, 엉덩이에 하나 깔고 앉았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옷을 입었다. 마르는 사이 바람이라도 스치면 목캔디를 문 것 같다. 아이스팩 국물을 뚝뚝 맞으며 수면 부족으로 멍하니 혼자 앉아 있다보면, 에어컨 빵빵하게 나왔던 회사마저 그리웠다.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나.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얀 마텔의 소설 에서 ‘파이’가 묻는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던 중 배가 침몰해 227일 동안 벵골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태평양을 표류했다고 하자 사고조사관들은 못 믿겠단다.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이 함께 구명보트에 탔다 차례로 숨지고 호랑이와 소년이 비처럼 내리는 날치떼한테 따귀를 갈겨 맞았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소년과 벵골호랑이는 밤이면 바닷속에서 형형색색 빛을 뿜는 물고기들의 도시를 봤고, 무지개 빛깔을 띠는 만새기 살을 나눠먹었다고 했다. 조사관들은 “그런 동물 나오는 이야기 말고” 진짜, 믿을 만한 사실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래서 현실과 더 닮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번째 이야기는 구명보트 안에서 벌어진 살육전이다. 파이, 파이 어머니, 요리사, 선원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먹거리가 떨어지며 선혈이 낭자한 지옥도가 펼쳐진다. 파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히말라야,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럼두들을 오합지졸 등반대가 오른다. 럼두들을 지도에서 찾지 마시라. 를 쓴 작가 윌리엄 어니스트 보우먼이 지어낸 이름이다. 어찌됐건 이 봉우리를 최초로 오른 등반대의 면면을 보자. 언어학자인 통역자는 수많은 결정적 오역으로 불신과 불만이 팽배한 등반대를 갈등의 최고봉으로 인도한다. 의사이자 산소전문가는, 만날 아프다. 가지고 온 온갖 의약품을 자기가 다 쓴다. 길잡이, 길을 잃어 첫 미팅부터 참석하지 못한다. 납치도 잘 당한다. 이 길잡이를 찾는 팀을 따로 꾸려야 할 정도다. 보급 담당은 오르는 것에만 집중하다 내려올 때 필요한 식량 따위를 챙기지 않는다. 과학자, 대체 이 사람은 왜 필요한지 알 수가 없다. 촬영팀, 장비가 항상 고장 나 있다. 요리사, 어떤 재료를 넣건 구역질 나는 갈색 액체로 만들어낸다. 안 먹으려고 하면 칼부림을 한다.

현실의 잔인함에는 맥락이 없다

무엇보다 눈치 빠르다고 자부하는 대장, 이 등반대를 보고 만날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한다”고 감탄한다. 주야장천 싸우는 팀원들을 보고 “이런 힘든 등반 와중에도 저렇게 치열한 논쟁을 하다니 서로 잘 맞는 짝이라는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감동하는 사람이다. 자기랑 아무도 한 텐트를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걸 팀원들의 “겸양”이라 해석하는, 인간을 향한 신뢰와 긍정의 화신, 또는 천진난만한 맹추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등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가장 큰 공은 아마 요리사에게 돌아갈 듯하다. 모두 그 갈색 죽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최선을 다해 산을 탔으니까.

현실의 잔인함에는 맥락이 없고, 고통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지 모른다. 노크도 없이 들이닥치는 불운들 앞에 무기력해져버리기도 한다. 세상은커녕 내 머릿속마저 통제할 수 없는 바다가 출렁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삶의 사건 대부분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는 내가 쓸 수 있다. 콧물과 눈물을 빼면서, 쓰고 지웠다 쓰고 지우면서, 이별을 독립의 이야기로, 상실의 고통을 한때 가졌던 행운의 증거로, 결핍을 공감의 끈으로, 그리움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으로, 쓸 수 있다. 쓸 수 있다고, 쓰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내 인생에 “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와 타인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쓰다보면, 핏빛 태평양을 표류하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생명체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함께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밝고 시끄럽고, 묘하고 섬세한 생명의 표정”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단 하나의 소망 ‘가을이 왔으면’

땀에 전 팔에 혀를 대보니 바다 맛이 났다. 폭염에도 장점이 있다. 시원한 찰나, 의심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에어컨 있는 곳에만 가면 기뻤다. 이렇게 쉽게 기쁠 수 있다. 밤에 못 자다보니 멍해 슬픈 일도 자꾸 까먹었다. 정수리에 얹은 아이스팩 때문에 머리가 띵해 무념무상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더위와 싸우느라 사람하고 싸울 기운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하고 친해졌다. 대화 소재를 찾아헤맬 필요가 없다. 더위 타령만 하면 공감 100%라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아, 시원해. 부러워요.” “집보다 나아요.” 편의점 직원과 이야기하다 1천원짜리 생수 한 병을 사려고 하니 직원이 여섯 개들이 사면 반값이라고 알려줘 3천원을 아꼈다. 거미줄을 떼던 아파트 청소 아주머니하고 ‘에어컨 없는 고통’을 놓고 이야기하다보니 내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다.

그리고 ‘젠장’ 폭염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자질구레한 꿈이 단 하나의 소망으로 수렴하는 데 있다. 가을이 왔으면. 그리고 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무 노력 하지 않아도 100% 이뤄지는 꿈을 꾸다니, 럼두들 등반대 대장이라면 “최고의 계절”이라고 감탄했을 것이고, 파이라면 그 안에서 신의 섭리를 보겠지.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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