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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재즈 라이프

세상 떠난 재즈 1세대 연주자 이동기 선생…

팔순 암투병 중에 펼친 마지막 열정의 무대
등록 2018-05-09 21:22 수정 2020-05-03 04:28
2016년 9월3일 서울 성수아트홀에서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 공연을 했던 고 이동기 선생. 페이지터너 제공

2016년 9월3일 서울 성수아트홀에서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 공연을 했던 고 이동기 선생. 페이지터너 제공

이동기 선생이 4월27일 세상을 떠났다. 올해 팔순을 맞은 선생은 한국 재즈 1세대 클라리넷 연주자다. 간암 투병 중에도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 서울 대학로 재즈 클럽 ‘천년동안도’에서 재즈 1세대 연주자들과 공연했다고 한다. 무대에 함께 선 피아니스트 신관웅은 “몸이 영 안 좋다가도 무대에서 연주하고 나면 안 아프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배에 복수가 차는 등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상태에서도 기를 쓰고 무대에 오른 이유이리라.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은 늘 그랬다. 돈이 안 벌려도, 관객이 없어도, 그저 모여 재즈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다. 1950~60년대 주한미군부대 클럽에서 어깨너머로 재즈를 배운 그들은 한국 관객 앞에서도 재즈를 연주하길 원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오른 밤무대에선 대중가요 반주를 해야 했다. 간혹 반주 도중 재즈의 즉흥연주라도 하면 잘리기 일쑤였다. 그들의 해방구 노릇을 한 곳이 한국 최초의 토종 재즈클럽 ‘야누스’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년처럼 수줍게 웃는 ‘피노키오’ </font></font>

재즈 1세대 보컬리스트 박성연은 “재즈를 실컷 노래하고 싶어서” 1978년 서울 신촌에서 야누스의 문을 열었다. 2년 앞서 서울 이태원에서 ‘올 댓 재즈’라는 재즈클럽이 문을 열었지만, 중국계 미국인이 운영하는 외국인 전용 클럽이었다. 야누스가 생기자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이 밤마다 모여들었다. 생계를 위한 밤무대를 마치고 나면 야누스로 달려와 밤새 즉흥연주를 펼쳤다. 야누스는 한국 재즈의 산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야누스는 재정난으로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녀야 했다. 신촌에서 대학로로 갔다가 다시 신촌으로, 이후 청담동을 거쳐 서초동 교대역 부근으로 옮겼다. 박성연은 신부전증으로 며칠에 한 번씩 신장투석을 받으면서도 무대에 섰다. 적자를 보면서도 야누스를 포기할 수 없어 자식처럼 아끼던 재즈 엘피음반 1700장을 팔아 운영 자금에 보태기도 했다. 3년 전 건강이 악화된 박성연이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야누스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후배 재즈가수 말로 등이 이어받아 ‘디바 야누스’라는 이름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연주자들의 열정과 희생, 헌신으로 근근이 맥을 이어가는 한국 재즈의 한 단면이다.

이동기 선생의 별명은 ‘피노키오’다. 피노키오의 것과 비슷한 모자를 늘 쓰고 다니는데다 소년처럼 수줍게 웃어서 붙은 별명이다. 선생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의 주제가 (When You Wish Upon A Star)를 즐겨 연주했다고 한다. 2010년 개봉한 영화 에도 선생이 음식점에서 악기를 꺼내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의 순탄치 않은 음악 인생이 녹아들었기 때문일까? 디즈니 영화가 시작할 때 디즈니 로고와 함께 흐르는, 꿈과 환상을 상징하는 곡은 선생의 클라리넷을 거치면서 구슬픈 가락이 되었다.

“내(피노키오)가 언제 사람이 되나…? 음악을 잘해야 사람이 되는구나. 왜냐면 내가 나팔장이이기 때문에…. 한데 그게 죽을 때까지 안 될 거 같아.” 선생은 특유의 소년 같은 웃음을 보였다. “사실 놀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이게 돈은 모이지 않는 직업이에요.” 고등학교를 마친 직후부터 장장 60년을 음악에 바치고도 ‘사람’이 되지 못하고 돈도 못 모은 그이지만, 그저 겸연쩍은 웃음 한번 짓고는 클라리넷을 불고 또 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제 남은 재즈 1세대는 8명뿐 </font></font>

는 재즈평론가 남무성이 제작하고 연출한 다큐멘터리영화다. 그는 대학 시절 종종 재즈 1세대의 클럽 공연을 보러 다녔다. 객석이 텅텅 비어도 늘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명받은 남무성은 훗날 그들을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다. 더 세월이 흘러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에 한국 재즈 1세대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해둬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영화는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고,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이 참여한 ‘브라보! 재즈 라이프’ 공연도 몇 차례 열렸다.

영화 개봉 이후 조상국(드럼), 강대관(트럼펫), 정성조(색소폰), 이동기 선생이 돌아가셨다. 이제 남은 재즈 1세대는 이판근(재즈 이론가), 김수열(색소폰), 류복성(퍼커션), 김준(보컬), 박성연(보컬), 최선배(트럼펫), 강태환(색소폰), 신관웅(피아노) 정도다. 이동기 선생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엔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은 물론 많은 후배 재즈 연주자가 다녀갔다. 한국 재즈 2세대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제주도 집에서 올라와 사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 발인식과 안장식 때 최선배는 트럼펫을 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임인건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럼펫 선율이 울려퍼지는 따뜻한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가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임인건은 제주 하도리에 산다. 그는 2015년 발표한 음반 《올 댓 제주》에 노래 을 만들어 실었다. 제주 출신 포크 싱어송라이터 강아솔이 불렀다. 임인건은 2016년 박성연과 야누스에 바치는 음반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를 작업하면서 이동기에게 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이동기 선생님은 연주만 했지 노래를 하신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25년 전 약주를 하시고 기분이 좋으셨는지 노래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목소리도 좋고 노래를 너무 잘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가 2년 전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더니 좋아하시더라고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일한 보컬 곡 </font></font>

그렇게 탄생한 이동기 버전의 은 선생이 녹음으로 남긴 유일한 보컬 곡이다. 선생은 노래한다. “하도리 가는 길 따뜻한 밝은 햇살/ 하얗게 곱게 핀 억새 웃고 있네/ 지금쯤 철새들은 호숫가 위를 날까/ 생각에 잠겨 가던 길을 멈춰보네/ 언젠가 이 길 역시 우리의 추억이지/ 지금 나는 이 길을 가 어릴 적 나와 함께/ 하도리 가는 길 푸른 바다 저편/ 멀리서 내 님이 나를 오라 부르네” 노래를 듣고 있으니 하늘에서 동료들과 만나 행복하게 연주하고 있을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본래 6월4일 저녁 7시30분 서울 서교동 웨스트브릿지 라이브홀에서 ‘이동기 데뷔 60주년 콘서트’가 열릴 예정이었다. 후배 음악인들이 선생을 모시고 협연하는 무대를 계획했지만 후배들이 선생에게 바치는 헌정공연으로 바꿔 진행한다고 한다. 기획사는 예매표를 환불해주기로 하고 무료 공연으로 바꿨다. 그날 공연에 가면 왠지 선생을 만날 것만 같다. 소년처럼 수줍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겨줄 것만 같다.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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