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을 때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란 마음으로 주변을 더듬자 솜으로 된 쿠션과 딱딱한 뼈대가 느껴졌고 뼈대를 더듬어갈수록 사각형 구조가 만져졌다.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발을 뻗었더니 무릎을 살짝 폈을 뿐인데도 끝에 닿았고 얼마 있지 않아 솜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옆으로 누운 성인 남자의 어깨보다 조금 높은 키, 쭉 뻗은 자세에 못 미치는 길이와 인조가죽, 그리고 쿠션 등을 고려할 때 내가 소파에 누워 있는지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새벽녘 소파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밤샘 택배 분류 작업을 마치고 같이 일하는 조 선배와 소주를 나눠 마신 다음 돌아오는 길이었다. 단지에 들어서 취기를 낮추려고 담배를 꺼내 물고 분리수거실 주변을 서성였다. 그때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작은방, 그러니까 내 방에 있던 소파였다. 어둡긴 해도 소파의 모습이 낡은 여행용 가방을 닮았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소파의 등받이 부분은 짙은 밤색으로 평범했지만 깔고 앉는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을 법한 구제 스타일 트렁크를 닮아 있었다. 약간 밝은 밤색의 사각형 트렁크, 모양뿐 아니라 실제 구제 트렁크로 보이도록 그림까지 그려진데다 클립과 단추 같은 인테리어 소품이 달려 있어 언뜻 보면 진짜 가방을 붙여놓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손잡이 양옆의 금속 클립을 동시에 누르면 딸깍 소리를 내며 천천히 주둥이가 열리는 그런 트렁크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밖에 나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위에서 자고 나온 터였다. 찜찜한 기분으로 담배 불똥을 손끝으로 툭 털어내고 소파에 앉았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설마 엄마가 기어코 버리고 만 것일까?
엄마는 좁은 방에 소파까지 들이는 건 무리라고 했다. 접었다 펼 수 있는 간이침대를 놓든가, 그것도 아니면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라는 식으로 잔소리를 해대고는 했으니까. 매형한테 눈치가 보여 그랬는지 모른다. 엄마는 대한민국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아파트를 손에 넣어야 한다며 있는 대로 대출을 받아 전세까지 낀 다음 아파트를 장만했다. 처음에는 일이천 올라 좋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일단 오르면 좋은 거고 어차피 끼고만 있어도 망할 일이 없다, 라는 생각은 순진했던 모양이다. 내가 가게를 얻기 위해 제2금융권에 담보로까지 잡힌 아파트에, 턱까지 찬 전세금을 내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는 깡통이 된 아파트를 팔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는데 그때 누나한테서 연락이 왔다. 언젠가 이 동네가 다시 뜰 거라는 확신을 했는지 살고 있던 소형 아파트를 팔아 전세자금을 마련하겠다고. 그런 다음 가족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누나와 매형, 조카 세윤이를 데리고서. 집은 매형과 엄마의 공동명의로 바뀌었고 석 달 뒤 나도 들어왔다. 낡은 트렁크 소파와 함께.
트렁크 소파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거미줄 같은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 어느 골목의 골목 거기서 또 골목의 끝 추로스&도넛 가게에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엉덩이 세례를 받겠노라고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골목 어딘가에서 거대한 타란툴라가 막고 섰는지 내 가게까지 찾아오는 이는 드물었다. 일단 입소문이 퍼지면 북한산 끝자락이라도 찾아올 거라는 믿음은 병신 같은 희망이었다. 가게는 여섯 달을 버티지 못했고 수천만원의 시설비만 날린 채 또 다른 희망이에게로 넘겨졌다. 시설을 몽땅 버리다시피 하고 나올 때 챙긴 유일한 물건 중 하나가 소파였다. 가게 테라스에 놓여 있던 안락의자는 매형 어머니가 쓰신다 하여 부천으로 보내드리고 소파는 침대 대용으로 쓰려고 작은방에 들여놨다. 소파를 구석에 밀어놓고 엄마에게 약속했다. 원룸 보증금을 마련할 석 달 동안만 얹혀살겠다고.
약속한 기일이 지났기 때문에 소파를 버린 걸까? 매형 눈치가 보여 그러는지 엄마는 최근 들어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서른도 훌쩍 넘었는데 앞으로 뭐가 될 거냐고 뭐가 될 생각이 있기는 하냐고 공연히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왜 달동네 하꼬방 같은 데서 과자나 굽는 일을 시작했느냐고. 거지 같은 소파 하나 남기자고 돈 칠천 털어먹었냐면서 말이다. 황홀한 갭투자의 성공은 물 건너간데다 명의마저 넘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인지 엄마의 말끝은 거칠고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처음에는 소파를 좋아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혼란스러우면서도 눈꺼풀은 무거웠다. 열두 시간 동안 택배 분류를 하고 나면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잠과 식욕에 맞춰진다. 뜨거운 사발면도 1분 안에 먹을 수 있고 사람들이 오줌 묻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작업장 한쪽의 종이상자 위에서도 꿀잠을 잘 수 있게 된다. 그 5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먼지바람에 목구멍이 간질거려도 부은 눈꺼풀은 돼지본드로 붙여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더불어 적당한 어둠과 좁은 공간이 주는 푸근함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처음과 달리 소파 안이 편안해졌고 비좁은 소파 안은 소파 바깥의 일이 들어올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안이 훨씬 더 안전한 곳인지도 모르겠다고.
소파 밖에는 사람들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 시간과 대출 상환일 같은. 반면 소파 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염고래의 종류,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의 운행 시간, 그리고 유튜브에서 본 다큐멘터리의 시답잖은 장면 같은 것들로 말이다. 대출금을 깎아주거나 할부금을 유예해주지도 않는 것들인데 저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어째서 소파 안이 이따위 것들로 채워져 있을 뿐인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마음이 편안했다. 어쩌면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상상하느라 현실을 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멍청한 상상을 수정구슬처럼 끌어안고 잠이 올 때까지 문질러대고는 했다.
실제 소파에도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곳이 있는데 왼쪽 팔걸이 부분이다. 소파에 누우면 발가락이 팔걸이에 닿았는데 잠들기 전까지 발목을 까딱거리며 그 부위를 쓰다듬고는 했다. 그래서 왼쪽 팔걸이 부위만 매끄럽게 윤이 났고 조카 세윤이가 그쪽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엄마는 세윤이를 들어 반대편 쪽에 내려놓고는 했다. 그러고는 이놈의 소파 좀 버리든가 하지, 라는 말을 지나가는 듯 흘렸다.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질 것 같으면 밖으로 나와 단지 안을 서성였다.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얼마 안 있어 거실 불이 꺼졌고 안방에 있는 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 다시 소파 위에 조용히 누웠다.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텔레비전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소파 위에서 자는 건 생각보다 편안하다고. 진짜 트렁크 가방처럼 뚜껑이 열리게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소파와 내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는지 소파가 느끼는 감각을 조금씩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우선 소파에 전해지는 온도를 순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싸구려 가죽을 데우고도 남아 이렇게 등에까지 전해진 걸 보면 시간은 오후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인 듯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각도를 가늠해봐서도 그랬다. 어쩌면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긴 때라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점심 때는 지난 것이고 먹는 것보다는 잠이 더 궁했으니까. 한 시간만 더 자게 해준다면 1ℓ의 피와 바꾸자 해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여전히 눈이 뻑뻑하고 무거웠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수천 번 오간 어깨도 콕콕 쑤셔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엊저녁의 잔업은 정말 너무했다. 알바들이 담당하는 시간대에는 유독 물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제는 그에 더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마저 빨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음 조와 교대할 때 보니 우리가 분류한 택배가 3천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피곤할 때 나오는 반응은 둘 중의 하나다. 기절하듯 쓰러지든지, 오히려 잠에 들지 못하고 희부연 허공을 매가리 없이 떠돌든지. 새벽에 업무를 마치고 로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그랬다. 눈앞의 사물이 흐릿하게 번지는 가운데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마음은 정처 없이 어딘가를 헤맸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리모컨을 미친 듯이 찾게 된다. 어떤 순간이든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마술 같은 리모컨을. 눈앞의 택배상자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잠깐만이라도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 말이다. 정말 그런 리모컨이 있다면 고래 뱃속에라도 찾으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방광이 터질 때까지 소변을 참다 오줌을 누면 노란 줄기 끝에 피가 섞여 나왔는데 그럴 때면 세정 버튼을 세 번 네 번 연속으로 누르며 얼른 흘려보내곤 했다. 그런 다음 목구멍을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가래를 그러모아 뱉고 생각했다. 초당 14㎝씩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다면 정말 세상도 멈춰지는 것일까 하고.
실제 딱 한 번 멈춘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던지지 말 것 고가의 스탠드가 들어 있습니다, 라고 쓰인 상자를 옮기는 중이었고 선배는 이어폰을 낀 채 작은 상자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선배의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던 라이터는 금방이라도 슉 빠질 만큼 주머니 안을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다 선배가 커다란 상자를 앞에 두고 상체를 숙였을 때 컨베이어 벨트 아래로 라이터가 떨어졌다. 플라스틱 조각이 거대한 압력에 눌려 바스러지는 소리, 베어링 어느 부분이 뻑뻑하게 끌리는 소리가 들렸고, 컨베이어 벨트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다 곧 멈춰 섰다. 당황한 선배는 이어폰을 집어던지고는 어떻게, 어떻게 소리만 반복했다. 나는 놀라고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라이터가 떨어질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 씨, 이거 어떡하냐.
작업반장이 달려오는 사이, 사람들은 일단 스위치부터 끄라고 운전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난 당황하는 척 선배를 바라보다 벽 쪽으로 걸어가 멈춘 세상을 조용히 바라봤다.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진 상자들, 그리고 소리를 지르는 반장의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러워 커다란 창이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캄캄한 어둠으로 넘어가는 중이었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궁금했지만 두꺼운 유리로 막힌 탓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지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물이 긴 꼬리를 물며 유리를 타고 흐를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쌓여왔을 먼지도 함께 씻겨나갔고 밤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재가동되려면 30분 이상은 걸리겠다는 운전팀 사람들의 얘기가 들렸다. 쌍욕을 듣고 있는 선배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뒷주머니에 넣어둔 에너지바를 꺼내 조용히 비닐포장을 뜯었다. 포장지를 구겨넣은 다음 사람들이 정신없어하는 사이 한입 물었다. 다섯 가지 곡물을 초콜릿으로 감싼 과자는 달콤했다. 불룩해진 뺨을 손으로 밀어넣으며 침과 범벅이 된 내용물을 목구멍 깊숙이 넘겼다. 에너지바를 씹는 동안 컨베이어 벨트는 멈췄고 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렇게 세상은 잠시 멈춰 있었다.
집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가운데 소파에 누워 잠을 기다리고 있으면 한없는 고요함이 비틀어진 척추 위에 내려앉았다. 그럴 때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잠에서 깨고 보면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멈춘 기분이 들었다. 지난 토요일 특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른 가족들은 새로 오픈한 고기뷔페에 가고 없었다. 사거리 어디로 나오라는 문자를 무시하고는 바나나를 입에 물고 추로스 가게에서 자주 들었던 보사노바를 플레이시켰다. 두 시간이 넘는 동안 해의 기울기는 변해갔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일시 정지된 상태였다. 다만 언제나처럼 잠의 끝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엄마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얘, 저녁 먹어. 세수도 하고, 얼른.
푹! 묵직하게 소파가 눌리면서 덩달아 내 허리에도 불편함이 전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파가 받는 느낌이 조금씩 더 선명히 전달됐고 살짝 찢어진 소파의 틈새로 약간의 시야도 확보할 수 있었다. 누가 앉은 걸까? 눌린 무게로 보아 엄마나 누나는 아닌 것 같았다. 경비 아저씨일까? 분리 배출을 하러 나온 사람일지도 몰랐다. 틈새가 넓지는 않아 우선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얼마간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응, 아니. 아직 안 버렸는데, 왜? 도로 가져가?
쉰이 넘어 보이는 탁한 목소리의 남자는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는지 목소리 끝에 가래가 끓었다. 아내와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뭔가를 도로 갖고 오라는 소리로 들렸다. 남자는 스탠드만 도로 가져가겠노라고 대답을 한 뒤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럭저럭 괜찮게 보였는지 쿠션 상태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날 깔고 뭉개고 있는 그에게 점잖게 말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이 소파에는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여기에 많은 잡동사니가 들어 있어요. 보통 소파가 아니라고요, 라고.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전달되지 않고 쿠션의 바람 빠진 소음만이 찢어진 가죽 틈으로 새어나갔다. 남자는 기대한 것보다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허리를 소파 등받이에 세게 밀면서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슬리퍼를 신은 발로 소파 밑동을 걷어찼다.
거죽만 그렇지 완전 쓰레기네.
찢긴 틈새로 남자를 올려보자 눈이 부셨다. 옅은 먹구름 사이로 늦여름의 해가 이글거렸다. 남자는 찡그린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가져온 종이상자를 평평하게 펴기 위해 손톱으로 테이프를 뜯었다. 그러나 퉁퉁한 남자의 손은 서툴렀다. 한번에 뜯지 못하고 쓸데없이 동작만 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 생각났다. 일을 시작하고 맞이한 첫 주말 1600개의 택배를 정신없이 분류하고 나자 돈이고 뭐고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내 마음은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를 달려 칠레의 땅끝 마을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칠레를 떠올렸을까?
언젠가 푼타아레나스행 국외 택배가 국내 배송팀으로 잘못 온 적이 있었다. 영문으로 갈겨쓴 주소가 낯설었고 무엇보다 긴 이름의 도시를 읽어내기 어려워 난감해하는데 반장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또 오류 났네. 아니, 이거 바코드 리더기에 문제 있나. 그러나 저러나 자네 이거 못 읽어? 여기 푼타아레나스라고 쓰여 있잖아. 몰라? 칠레 항구도시 푼타아레나스. 아,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그것도 몰라?
그래요? 저는 처음 들어봐서.
그려? 나처럼 삼십 년 넘게 우편, 택배, 탁송 이런 업계에만 있어봐. 상투메 프린시페, 기니비사우, 거 뭐냐 산토도밍고. 세상천지 모르는 데가 없어.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발음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운율, 그리고 이런 곳에도 택배가 가는구나 싶은 마음에 푼타아레나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는 별다를 게 없었다. 도시의 인구와 규모 그리고 기후 정도, 그저 그런 도시란 생각을 하던 중에 ‘푼타아레나스의 사람들’이란 오래된 다큐멘터리가 눈에 띄었다. 뭔가 특별한 게 있나 싶어 플레이를 시키자 한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허름한 목조 주택 거실에 놓인 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는데 김이 올라오는 동안 고개를 기울여 더운 기운이 뺨에 닿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뺨의 흉터에 촉촉이 물기가 맺혔고, 남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한 모금 마셨다. 커피를 마신 다음에는 자신을 뱃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있는 이곳은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가 만나는 원양어업 기지의 최전선 푼타아레나스라고 말했다. 남자의 굵은 목주름과 뺨의 흉터가 클로즈업되는 동안 성우가 말을 이었다. 푼타아레나스는 칠레 남단 마젤란해협에 접한 도시로 푸에고섬의 우수아이아를 제외하면 세계 최남단의 도시로서 지명은 ‘모래밭의 곶’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파나마운하가 개통하기 전까지는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 간의 연락항으로 큰 역할을 했는데 1990년대 이후로는 쇠락하고 있다고. 그때 난 남자가 앉아 있는 낡은 소파를 보며 성우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왠지 그곳이 어디인지 꼭 기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소파에 편히 기댄 남자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눈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듯 보이면서도 깊은 곳에 닻을 내린 느낌을 주었다. 자외선을 많이 받은 탓인지 탁해 보이는 눈동자는 오랫동안 창밖을 응시했고 조금 있자 주방에 있던 래브라도레트리버 한 마리가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개는 킁킁대며 고개를 휘저었고 남자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말갛고 빨간 혓바닥을 내밀고 침을 흘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남기로 결심을 했죠.
대다수 선원들은 칠레 여자와 짧은 연애를 한 뒤 몇 푼 쥐어주고 떠나는 게 다반사였지만 자신은 남기로 했다고. 더러 임신한 여자까지 버리는 경우가 있을 만큼 선원들은 이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노라고 말했다. 그와 달리 자신은 푼타아레나스에 머물 결심을 했을 뿐이라고. PD가 왜냐고 묻자 담배를 꺼내든 남자가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면 남태평양과 대서양 그리고 남극해의 물결이 한데 모여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바다는 날마다 새롭고 여기에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고 싶지도, 될 필요도 없다고 말하며 순한 미소를 지었다. 화면은 남자의 얼굴을 비추다 이내 창밖 풍경을 보여줬는데 항구가 멀지 않은지 여기저기 어선이 정박해 있는 풍경과 하역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곁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담아냈다. 그렇게 앵글은 쇠락한 항구의 구석구석을 훑다 거대한 크레인 위로 초점을 옮겼는데 그곳에 재갈매기가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던 갈매기는 갑자기 몇 걸음 나오더니 머리를 까닥거리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틀림없이 따로 찍은 뒤 편집한 것이었을 테지만 마치 네가 앉은 그 낡은 소파는 아주 먼 바다를 건너왔구나, 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남자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파묻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 뒤로도 거실을 거닐며 이런저런 얘길 덧붙였다. 푼타아레나스에 닿기 전에 수마트라의 어느 항구에 오랫동안 머문 적도 있었고 베링해의 거친 파도를 건너본 적도 있다는 얘기들. 남극해 주변을 항해할 때엔 흰수염고래를 만난 적도 있다는 그런 얘기들 말이다. 허풍 섞인 얘기와 그의 꼬부라진 콧수염이 재밌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가 앉은 소파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다음 내용은 기억이 흐릿하다. 무책임한 선원들을 나무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고, 산업의 최전선 기지에서 고생하는 역군들을 응원하는 내용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남자의 눈빛과 소파가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남자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살짝 웃고는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의 옆모습이 엔딩 장면으로 잡혔다. 꽤 아팠을 법한 상처는, 시간이 멈춘 소파 위에 누울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괜찮다는 듯 옆모습에 드러난 바늘 자국은, 흉측했을 처음과 달리 제법 아물어 있었다.
종이상자를 정리하고 분리수거를 모두 마친 남자는 뭔가 아쉬웠는지 떠나기 전 다시 한번 털썩 앉았다 일어섰다. 그 바람에 소파가 출렁였고 그 출렁임은 파도를 닮아 있었다. 이대로 대양의 끝 푼타아레나스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낡은 소파에 앉아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 끝도 없이 부풀어올랐다.
제법 오래 갇혀 있었던 탓에 허리가 결렸지만 밖에 나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새벽 1시 특근 교대 전까지는 쉬고 싶었다. 다시 잠들기 위해 송충이처럼 몸을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선잠이 들었을 때 작고 여린 손길이 느껴졌다. 간지럽고 그러면서도 자극적인 뭔가가 종아리 부근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이번엔 또 뭘까.
지은아 이거 봐, 잘됐지?
응, 완전 똑같은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됐을까 싶은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찢긴 틈으로 하얀색 타이즈에 분홍 원피스를 입은 아이와 태권도 도복을 입은 여자애가 서 있는 게 비스듬히 보였다. 그중 분홍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소파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엿듣고 있자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여자애 중 한 명이 캐릭터 스티커를 소파 한쪽에 대고 손톱으로 문질렀던 모양이다. 분홍 원피스의 여자애가 더 자세히 보려고 상체를 수그리자 아이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소파에 닿았다. 난 아이들의 장난을 지켜보며 세윤이를 떠올렸다.
여섯 살 세윤이도 한때는 자주 그랬다. 특히 사람 몸에 스티커 붙이기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건 삼촌의 몸이었다. 알이 통통하게 오른 종아리에 대고 그러길 좋아해서 자고 일어나면 도라에몽에 나오는 도라미나 타요에 나오는 캐릭터가 내 몸에 새겨 있었다. 잠에서 깬 내가 스티커를 지우려고 들면 세윤이는 지우지 말라며 목에 매달리고는 했다. 그러면 스티커를 지우지도 못하고 출근했는데 다음날 퇴근하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스티커를 확인했고 많이 지워져 있으면 내가 소파에 누운 틈에 또 다른 스티커를 새겨놓고는 했다. 난 평소 놀아주지 못해 미안했던 탓에 꼼짝 않고 세윤이를 기다려주었다. 캐릭터가 부서지지 않고 온전히 새겨질 때까지 말이다. 그러면 세윤이는 감은 내 눈에 자기 손을 흔들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세윤이가 붙여준 스티커 중 가장 마음에 든 건 고래 캐릭터였다. 인어공주에서 나왔는지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건지는 몰라도 커다란 고래가 수면 위로 반쯤 몸을 드러내고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일을 하다보면 스티커의 고래와 눈이 마주쳤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흰수염고래가 생각났고 흰수염고래를 떠올리면 푼타아레나스가 궁금해졌다. 낡은 소파가 있는, 시간이 멈춘 그곳이.
은지야, 근데 여기다 붙여도 돼?
될걸? 이거 버린 거잖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는 하나 더 붙이겠다며 가방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성가셨지만 세윤이를 생각해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한동안 꽤 즐겼던 세윤이는 얼마 전부터 싫증이 났는지 스티커 놀이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어쩌다 붙이더라도 냉장고에 한두 개 붙이는 정도였다. 일부러 자는 척을 해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고 가끔 곁에 오더라도 스티커를 꺼내는 대신, 삼촌은 집이 어디야, 라고 물으며 발그레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삼촌 나가면 세윤이 방으로 꾸며주겠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야, 어떡해. 비 온다.
도복을 입은 여자애가 가방을 집어들고 놀이터 쪽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러자 스티커를 반밖에 붙이지 못한 여자애가 허둥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이 뛰어가는 사이 빗방울이 낡은 소파 위로 떨어졌다. 둔탁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은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제법 리듬이 느껴지는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노를 젓는 어부가 앞발을 까딱이는 것처럼 정겨웠다.
툭, 투투둑, 툭 툭.
비는 늦여름의 소나기답지 않게 그칠 듯하면서도 한동안 더 내렸는데 찢긴 틈새를 타고 소파 안으로도 흘렀다. 약간의 오한이 느껴져 축축이 젖은 몸을 부둥켜안았다. 비가 반갑지 않은 건 고양이도 마찬가지인지 소파 팔걸이 밑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웅크리고 앉았다. 녀석은 물이 튀긴 수염을 발바닥으로 몇 번 털어내다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렸다. 고양이가 돌아본 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찢긴 틈 사이로 싸구려 천으로 만든 바지와 낡은 운동화가 보이는 걸로 봐서 경비 아저씨인 듯했다. 그는 종이상자가 담긴 커다란 마대를 얼른 처마가 있는 곳으로 끌었다. 그러고는 어지럽게 널린 유모차와 장난감 트럭을 한데 모으고 내 앞으로 왔다. 빗방울이 모자를 타고 내려 그의 얼굴을 적셨다. 피곤한 듯 보였다. 새벽에도 본 것 같은데 그 역시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 씨, 누구야. 어떤 인간이 또 딱지도 안 붙이고 이렇게 놨어. 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CCTV 확인해야겠구먼.
그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소파가 버려진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경비 아저씨는 씩씩거리며 관리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엄마가 버린 걸까? 언젠가 엄마도 소파가 예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게를 오픈하던 날 내가 만들어준 추로스를 들고 그 위에 앉아 차를 마셨다. 위가 좋지 않은 엄마는 커피 대신 마테차를 끓여달라 했고 내가 끓여준 차를 받아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참 푹신하고 좋다. 어디서 샀어?
이태원 앤티크 거리서 여섯 시간 발품 팔아서 구했지. 그 주인이 그러는데 3년 동안 안 팔리던 걸 내가 산 거래, 하하하.
아유, 뭘 그런 얘기를 한대. 재수 없게. 어쨌든 진짜 특이하다, 이 소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곰곰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어제 오후 출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파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었다. 매형은 퇴근 전이었고 엄마와 누나는 세윤이 때문에 피자를 시켜 먹고 있었다. 한 조각 먹어보라는 누나에게 조금만 더 자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누나가 식탁 어쩌고 하는 말을 잠결에 들었던 것도 같은데 별일 아닌 듯해 흘려들었다. 어쩌면 소파를 버려도 괜찮냐고 물었던 것일까?
비가 그치고 얼마 후면 해가 질 것이고 다시 출근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얼른 소파에서 나가 출근 준비를 해야 할까, 아니면 조금 더 잠을 자야 할까? 오한에 머리까지 지끈거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리모컨의 존재가 미칠 듯이 간절해졌다. 내가 만일 신이라면 그런 리모컨을 어디에 숨겨놓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세 개의 대양이 맞물려 흐르는 곳,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살고 있는 푼타아레나스밖에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다는 잔잔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푹신하게 허리를 묻을 수 있는 소파 그 안에 말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뜸했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중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엄마와 누나일까? 세윤이가 삼촌 소파 버리지 말라고 성화를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빨래를 널기에 낡은 소파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일지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야, 이거 횡재했네.
아주 좋아죽네. 좋아죽어. 그렇게 좋아?
아, 좋지 그럼.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일해먹지.
한 사람은 조금 전에 다녀간 경비 아저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맞은편 3개 동을 담당하는 경비 아저씨였다. 두 사람은 다행히 관리소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아, 이럴 줄 알고 폐기물 스티커 하나 구해놨지, 이 사람아. 수소문해서 인터폰으로 연락하니까 그 여자가 그러더라고, 자기가 깜빡했다고. 식탁 배달해준 사람들이 낡은 소파를 대신 버려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말만 하고는 깜빡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가 돈 갖다줄 테니까 우선 나보고 붙여주면 안 되냐고 하잖아. 요놈은 지난주 목요일에 누가 붙여놓은 거 내가 살짝 뜯어놓은 거고.
아저씨 말에 따르면 그랬다. 어떤 멍청한 사람이 재활용되는 줄도 모르고 엄한 물건에 폐기물 딱지를 사서 붙여놨더라고. 그래서 자기가 살살 떼어 보관하고 있었다고.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공으로 생긴 4천원이 어지간히 좋았는지 소파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빗물에 젖은 부분을 손바닥으로 털어낸 다음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닦았다.
가만있자, 요놈을 어디에다 붙이냐.
그는 이리저리 재다 좀 전의 여자애가 붙이다 만 자리 미완성으로 남은 스티커 자국 위에 폐기물 딱지를 붙였다. 얼마나 꼼꼼히 붙이는지 동그란 딱지 군데군데를 손톱으로 문질러가며 습기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런 다음에도 수건으로 한 번 더 눌러 마무리를 했다.
경비 아저씨가 떠나고 초저녁 땅거미가 소파를 덮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몸을 웅크리는 사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윤이었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누나와 간단한 장을 보고 간식도 사먹을 모양인 것 같았다. 나올 때 재활용 상자에 가득 찬 맥주캔을 들고 나왔다면 근처를 지나칠 테고 어쩌면 소파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날 알아볼 수 있을까? 귀찮아 곧장 아파트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내밀고, 이 소파 정말 버린 거야, 라고 물어야 하겠지만 그저 엉뚱한 상상만 들 뿐이었다. 어쩌면 경비 아저씨가 붙여준 스티커는 폐기물용이 아니라 해외 배송을 뜻하는 특별 우표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해외 배송 택배가 우리 쪽으로 넘어올 때면 택배상자를 유심히 보고는 했는데 언제나 동그란 모양의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물결 모양의 도장이 새겨진 택배를 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했다.
난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푼타아레나스로 향하는 바다 위의 소파를 떠올렸다. 소파는 한참을 떠돌다 태풍을 만날지도 모른다.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 남반구 끝에 닿자면 말이다. 하지만 조금 고돼도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피곤한 몸을 소파 안쪽에 바싹 붙이며 잠꼬대처럼 말했다.
이 소파는 푼타아레나스행 택배로 분류됐습니다.
가작 ‘푼타아레나스행 택배’ 김영석씨 수상 소감
아름다운 곳에 닿기를 소망한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돌아가던 길, 그날도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문득 낯선 곳에 선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길의 끝까지 걸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바보 같은 짓임을 알면서도 해진 운동화는 앞을 차고 나아갔다. 낯선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잘못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말하는 머릿속 지도가 처음부터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목표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내 손에 지도 같은 건 들려 있지 않다. 다만 푼타아레나스와 같은 남반구의 아름다운 곳에 닿기를 소망할 뿐이다.
푼타아레나스에 닿지 못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두려운 길 한가운데서 만난 손바닥문학상이라는 휴게소, 지금은 그 휴게소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수상 소감을 쓰고 있다. 과 심사위원들께,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실 분들께 감사하며.
모두가 닿으려는 곳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번쯤 용기 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 자신, 그리고 우리를 응원하고 싶다. 모든 지도의 처음은 낯선 길에서 시작됐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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