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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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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아이'와 대면할 시간

이제 지난날의 나를 꼭 안아줄 때…

상처를 꺼내보는 순간 힘이 나온다
등록 2017-11-09 10:58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상처로부터의 줄행랑’이었다. 서른 넘어서도 내 상처와 대면하는 법을 몰랐다. 아픔에서 무조건 도망치면 아픔이 마치 오래전 책갈피에 끼워두고 영영 펼쳐보지 않은 단풍잎처럼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상처는 밀림 속 복병이었다. 이 앞에 무엇이 펼쳐 있을지 알 수 없는 빽빽한 밀림에서, 트라우마는 마치 은밀한 복병처럼 아무 데서나 튀어나왔다. 내가 트라우마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내가 콤플렉스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가 진정한 내 모습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상처와 정면승부하는 것. 내 상처를 맨몸으로 대면하는 것.

사라지지 않는 아이

알고 보니, 나는 ‘대면’이라는 단어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과 대면하기도 두려운데 상처와 대면이라니. 활 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채 전쟁터에 나서는 병사가 된 기분이었다. 하늘의 별만큼 많은 상처들 중 내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내면아이’란 녀석이었다. 진짜 어른이 되려 평생 애썼는데, ‘알고 보니 너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내면아이’라는 심리학 용어에 그토록 반항심이 들었던 이유는, 그 단어가 지금껏 내가 어렵게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툴툴거리지 않고 남 탓도 하지 않는 듬직한 어른이 되려 그토록 애썼는데, 또다시 ‘어쩔 수 없는 내 안의 나약한 소녀’로 퇴행하는 느낌이었다. 이 단어를 알았을 때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철딱서니 없는 내면아이 따윈 안 키울 테야.’ ‘내면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느니 차라리 내 귀여운 조카와 수다를 떨겠다!’ ‘내면아이 따위에 신경 쓸 틈이 어디 있어, 성장하기도 바빠죽겠는데.’ 이렇게 온몸으로 내면아이를 부정하는데, 뜻밖에 내 안에서 처음 듣는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어리고 유치하지만, 어디로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내면아이의 목소리가. ‘네가 나를 항상 무시하니까 그렇지. 날 무시할수록 넌 더 힘들어져. 네가 나를 아무리 무시해도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당혹스러웠다. 이 아이가 그동안 어디 숨어 있다 지금 튀어나온 걸까. 오래전 영원히 떠나보낸 줄로만 알았던 내 안의 철부지 소녀가 이제 어른이 된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냉동인간처럼 숨죽이고 있다가 내면아이라는 외부의 자극을 받자마자 마치 오랜 마취에서 깨어난 듯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아이는 다급한 얼굴로 나를 채근했다. 어서 자신을 달래달라고, 어서 자신을 일으켜달라고 보챘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이제 나에게 내면아이를 다독여줄 힘이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저버린 내면아이 중 제일 먼저 기억난 소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였다. 한없이 부러워하면서도 좋아했던 같은 반 친구가 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된 어느 날, 나는 ‘영원히 좋은 친구를 가질 수 없겠구나’ 하는 강력한 확신이 생겼다. 어디서부터 처절한 절망이 그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 번져나왔는지 알 수 없다. 그땐 그랬다. 영원히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번의 실패가 있었고, 최선을 다해 친구에게 잘 보이려 했지만, 이제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빨간 책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면서 내가 울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동경과 우정을 구분하지 못한 그때

그땐 알지 못했다. ‘친구에게 잘 보이는 것’과 ‘친구를 사귀려는 진심 어린 노력’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친구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친구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애쓰느라, 친구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친구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나의 못난 면만 커다랗게 도드라져 보였다. 그 아이가 그저 좋았기 때문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까지 우정이라 믿었다. 이미 평등하지 않은 관계, 이미 내가 접고 들어가는 관계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아이의 훌쩍 큰 키와 화려한 외모, ‘올수’인 성적과 우아하고 세련된 부모님, 그 모든 것에 주눅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집이 워낙 가까워 거의 날마다 그 아이와 함께 하굣길을 걸어야 했다. 어쩌면 그 아이와 나의 하굣길이 같지 않았다면 영원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우리에겐 공통점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야기 나눌 가슴 떨리는 화제도 없었다. 그때는 그걸 인식하지 못했지만, ‘유치원 때부터 쭉 친구였으니까 그 아이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우정의 관성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과 ‘진심 어린 우정’을 구분하지 못했던 그때는, 그 아이를 잃는 일이 온 세상의 우정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고, 앞으로 사귈 수 있는 친구에게조차 모조리 닫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 내가 그 시절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내면아이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기 직전이었고, 이후 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그 시절의 ‘짓밟힌 영혼’은 회복되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 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살다보면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척 외로워질 때가 많다고. 그건 내 외로움과 무력감 때문이지 친구 탓은 아니라고. 친구에게 잘 보이려 하지 말고 그냥 네 솔직한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라고. 무엇보다 좋은 친구가 기적처럼 너에게 다가오기를 바라지 말고, 네가 먼저 다가가 좋은 친구가 되라고. 내가 맺은 모든 관계가 철저히 일방적인 짝사랑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땐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봐야 한다고.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똑같이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것으로 나는 충분해’라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봐. 너는 틀림없이 좋은 친구를,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고 애틋하게 여기는 친구를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그건 장담한다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동경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마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아주 자연스럽고, 똑같은 무게로 돌려받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감정이며, 네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소중한 빛이니까. ‘그러니 내 안의 철부지 아이야, 이해받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줘. 네 마음을 보여줄 진짜 친구를 만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마.’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그 단발머리 소녀는 절대 흐느끼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리더니 어느덧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정말 나한테도 좋은 친구가 반드시 생긴다, 이거지? 그게 도대체 언제야? 거짓말은 아니지?’ 아이는 처음으로 아이답게,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까르르 웃더니 다시 빨간 책가방을 힘껏 고쳐 메고 씩씩하게 걸었다. 이제 혼자라도 괜찮다며. 똑같이 돌려받지 못해도 계속 사랑하겠다며. 사랑받지 못해도 계속 사랑하겠다며. 나의 내면아이와 첫 번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괴물 같은

그 골치 아프면서도 짠하기 이를 데 없는 내면아이 중에는 꽤 커다란 녀석도 있다. 몸만 어른이지 속은 겁이 잔뜩 들어찬 스물아홉 살의 나도, 알고 보니 내면아이였다. 그때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집안은 풍비박산됐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은 빚더미에 앉았다. 어디가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빚을 물려받았고, 글 쓰고 강의하며 근근이, 그야말로 애면글면 11년 동안 빚을 갚았다. 빚에서 해방됐을 땐 ‘진정한 자유의 나날’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에게 빚을 떠넘긴 아버지에 대한 원망, 나를 힘껏 도와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원망, ‘네가 그 빚을 다 떠안는 수밖에, 우리 집은 다른 길이 없다’는 식으로 부담을 주었던 모든 사람에 대한 증오가 얽히고설켜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11년 동안 고슴도치처럼 살았다. 온몸에 가시가 돋아나 아무도 내 상처 안으로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누가 나를 껴안아도 내 마음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만을 느꼈을 것이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그 빚에서 벗어났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내 청춘을 다 바쳐 아버지의 빚을 갚았구나’라는 절망감이 고개를 들어 더욱 뼈아픈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빚만 갚으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일’이 끝나고 나자 ‘진짜 감정’이 몰려왔다. 무의식에 오랫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온갖 원망이 폭발했다. 나는 사회적으로 어른이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괴물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제야 아프게 깨달았다. 이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안아줄 시간임을.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고 또 벌어야 했던, 그래서 가끔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도 기꺼이 떠맡았던 지난날의 나를 온몸으로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빚을 갚을 때마다 오히려 내 영혼의 일부가 조금씩 파열되는 느낌이었다. 돈을 벌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벌수록 내 꿈에서 멀어지는 느낌.

내면아이와의 만남에서 주도적으로 말을 걸어야 하는 쪽은 성인이 된 나 자신이다. 내면아이는 뜻하지 않는 순간 오래된 트라우마의 형태로 감정을 표현할 뿐, 자신이 나서 직접 행동할 수 없다. 성인 자아가 먼저 말을 걸어주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깨달은 것들’을 이야기해주면, 내면아이는 비로소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래오래 숨겨두기만 했던 자신의 상처를 꺼내 보여주며 흐느낀다. 나는 내면아이에게 말을 건다. ‘오늘 하루도 힘들었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네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해 미안해.’

이제 예전보다 꽤 자란 듯한 내 안의 단발머리 소녀는 손사래를 친다. ‘괜찮아, 이젠 네 도움 없이 잘 지낼 수 있어.’ ‘다른 아이한테 가봐.’ 그러면 나는 일곱 살의 나에게, 열세 살의 나에게 여기저기 노크하며 ‘너는 어떻게 지내니?’라고 안부 인사를 한다. 아직 온전히 위로받지 못한 수많은 내면아이들은 저마다 외로운 감방에 틀어박혀 구조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이제는 말끔히 상처가 다 나은 얼굴로 해맑게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진짜 내 모습을 만나는 순간

상처가 고개 드는 순간, 내면아이가 제발 나를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순간은 분명 위기이지만 ‘내 안의 진짜 내 모습’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상처의 처절한 양면성을 조금 알 것 같다. 상처를 꺼내 대면하는 순간은 미칠 듯이 고통스럽지만, 상처를 꺼내보는 순간 내 안에서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커다란 힘’도 함께 나온다는 것을.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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