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숨고 싶었다. 부끄러웠다. 추석이 가까워오거나 제삿날이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아버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추석에도 따스한 이야기를 해주는 어른이 없었다. 농사짓던 아버지는 제주 4·3 민중항쟁 때 불법 군법회의로 육지 형무소에 끌려가 어디서 죽었는지 모를 행방불명인이었다. 묘 없는 제사를 지내야 했다.
하지 말아야 했던 말급기야 연좌제가 적용돼 직장에서 잘린 날, 청년 아들은 가슴에 쌓인 울분을 토하고야 말았다. 내가 왜 이래야 하냐며 제상을 엎어버렸다. 기어이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꽂고야 말았다. 차마 어머니한테 직장에서 잘렸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할 수 없던 금기의 시대를 살아낸, 아무 말씀도 못하시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 수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미안합니다. 사과 한마디 못했어요.” 이 칠순의 아들, 어머니가 그립고 죄스럽다. 그렇게 아들의 사과도 받지 못하고 떠나간 어머니였다. 그로 인해 가슴엔 구멍이 생겼다. 그게 왜 어머니 탓인가. 야만의 시대가 저지른 역사였음을 그땐 왜 몰랐던가. 한순간의 분을 그땐 왜 참지 못했던가. 명절 때는 아버지 이름 쓰인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에 손자 데리고 가서 술 한잔 드리고 온다는 그다. 며칠 전 만난 그는 명절이 돌아오면 어머니가 떠오른다며 또다시 왈칵 눈물을 보였다. 자식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눈물이었다.
이제는 4·3 행방불명인 진실 규명에 온 힘을 던지고, 4·3 명예교사가 된 그다. 이제는 부끄럽지만 아이들에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모르면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고. 그러면서 그가 그랬다. 어머니한테 정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고, 해선 안 되는 말이었음을 그땐 왜 몰랐을까, 반성한다고.
시간이 흘러야 아는 걸까. 우린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내며 산다. 그런 경험 없는 이 있을까마는, 서로의 결함을 들여다보며 위안 삼는다.
추석 가까워 고향 찾아온 벗들을 만난다. 친한 후배는 예전보다 훨씬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나이 탓일까. 늘 그리운 고향인데 왜 이곳에 오면 상상이 빗나가는지 모르겠다던 그녀. 모처럼 시댁 식구를 만나고 친정을 찾았는데 묵직한 돌덩이 하나 얹고 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런 명절증후군 같은 그늘을 걷어내는 데 1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단다. 돌이켜보니 그냥 서로에 대한 예의의 문제였던 것 같다. 이쪽도 저쪽도 예의를 갖췄다면 관계는 훨씬 좋아졌을 거란다.
사람 사는 세상, 물론 사람 일이라 잘나가던 관계도 말 한마디에 껄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렇다. 하지 말아야 할 말 뱉어놓고 가슴앓이한 적 누군들 없겠는가. 그럼에도, 종종 잊으며 산다. 돌아보면 내 마음에 여유가 없거나 기쁨이 없을 때 그 상처를 곧잘 받는지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이 필요한 시대, 최근 젊은 시인 박준이 낸 산문집 속 이 한 문장을 곱씹어본다. “역으로 나는 타인에게 별 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숨 한번 쉬어가시라고곧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지독하게 그리운 얼굴들이 달에 있던가. 여유를 찾으라고, 한번쯤 잊고 지낸 사람들을 찾아보라고 달은 빛난다. 소소한 나의 행동에, 나의 말에 가슴 다친 사람들이 어디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달이 환하다. 이 부풀고 부푼 달이 켜준 우주의 등 아래 종종걸음 치며 추석이 온다. 그러니 꼭 가슴에 매어두지 않아도 되는 말은 내려놓고, 풀고 가시라고. 숨 한번 쉬어가시라고 추석달이 온다.
제주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 위로 며칠 뒤면 만삭의 달이 뜨리. 이 아픈 역사의 오름엔 둥글고 넉넉한 굼부리가 있다. 풍덩 빠져도 좋을 만한, 그만한 달도 온다면 포옥 안아주겠다는 양 넓다. 달빛이 서러운 가슴들을 채워주리라. 그럼에도 어려운 시대, 이렇게 잘 견뎌왔다고 다독여주리라. 괜찮다면, 그 고운 달빛 한편 가슴에 담아가시기를 권한다. .
허영선 시인·제주 4·3연구소 소장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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