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상처 낫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져버렸다. 베이거나 멍든 상처가 좀처럼 빨리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흉터를 남기곤 한다. 대신 마음만은 몸과 달리 예전보다 훨씬 회복력이 좋아졌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마 진짜 강심장을 가지게 되었다기보다 ‘이 나이에 이만한 일로 아파해선 안 된다’는 마음의 고삐가 훨씬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의 자가 치유 테라피를 끊임없이 궁리하다보니, 내 상처를 스스로 기우고 꿰매는 데 익숙해져서이리라.
‘이 나이쯤 되면 이 정도로 힘들어해서는 안 돼’라는 자기최면이 너무 강해, 내가 힘든 것을 나도 잘 모른 채 지나가다가 낭패를 볼 때가 있다. 마음의 내상(內傷)이 나도 모르게 깊숙이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펑 터져버리는 것이다. 그제야 뒤늦은 충격에 허둥대며 깨닫는다. 내 힘으로 나를 위로할 수 없을 때가 있구나. 셀프 테라피만으로 안 되는, 반드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위안이 있다는 것을.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건 어쩌면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도 타인의 도움을 구할 용기를 포함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천사의 위로처럼 따스하고 달콤하게 </font></font>이번 슬럼프의 시작은 치통이었다. 어금니에 통증이 심해져서 치과에 갔더니, 충치와 잇몸 염증이 심각해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안에 마취주사를 네 군데나 놓는 동안 나는 겁에 질려버렸다. 20년 전 사랑니를 뽑던 순간, 그 극한의 공포가 생각나 부들부들 떨었다. 이 나이에 이런 공포를 느끼는 게 부끄럽지만, 치과 치료는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길들여지지 않는 공포였다. 너무 겁을 냈던지 자꾸 나도 모르게 입을 오므리자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힘드신 거 알지만, 조금만 더 입을 크게 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매우 소심하게 ‘아’ 하고 입을 벌렸더니, 의사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1시간가량 치과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고맙습니다’란 말을 무려 열 번 가까이 들었다. ‘고맙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천사의 위로처럼 따스하고 달콤하게 들렸다. 이게 과연 고마울 일인가. 뜻밖의 상황에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더니,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었던 마음, 무서운 마음, 고통스러운 마음까지 한꺼번에 풀렸다. 이렇게 따뜻한 감사의 인사는 아무리 많이 주고받아도 지겹지 않을 것 같다. 축복할수록 감사할수록 그 열린 마음의 틈새로 인생의 빛이 더 많이, 더 깊이 스며들 테니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 어떤 감사의 인사는 천 길 낭떠러지의 공포를 이겨내게 한다.
치과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미처 몰랐던 내 자신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예전보다 훨씬 자주 아프고, 더디 낫는다. 몸보다 마음이 더 문제다. 마음이란 녀석의 연기력은 워낙 신출귀몰해서 그 연기력에 내가 속는다. ‘나는 괜찮다, 잘 지내고 있다’는 강박적인 자기최면으로 인해 ‘괜찮지 않은 마음들’은 더 깊은 무의식의 숲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얼마 전 엉뚱하게도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울컥했다. 버스킹(거리 공연)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펼쳐지는 가수들의 아름다운 도전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저렇게 아무도 나를 몰라주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진짜 나의 ‘첫마음’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서 관객은 아무도 이 가수들을 모른다. 무대는 언제 어디서 예측 불능의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리 한복판이다. 베테랑 가수 윤도현조차 더블린의 비 내리는 공원에서는 자신의 히트곡을 끝까지 다 부르지 못할 정도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font></font>하지만 의 가수들은 오직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뭉쳐 환상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눈을 꼭 감고 다른 그 무엇에도 주의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며 오직 음악의 바다로 자기 온몸을 던지는 가수 이소라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분명 내가 아는 오래된 노래인데 마치 완전히 새로운 노래처럼 싱그럽고 찬란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절박함이 더해지자 익숙한 노래가 완전히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내가 되찾고 싶었던 첫마음. 내가 혹시 영원히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했던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내 글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싶은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서 자꾸만 길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운 벗에게 전화라도 걸어 ‘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묻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자존심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을까. 마음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니, 마음속에 어떤 뿌리 깊은 패배감이 가로놓여 있다. 실패한 것, 힘들었던 것만 생각날 때가 요즘이었다. 최근 생긴 마음의 상처는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강의 때문이었다. 나는 우호적인 청중 앞에서는 신명나게 강의를 하지만 ‘아, 여긴 아니구나!’ 싶을 때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해버린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문학적 글쓰기 특강을 했다. 2시간 내내 마치 적진에 홀로 버려진 형편없는 부상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버젓이 내놓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어떤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다가 마침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목청껏 떠들어도 소용없었다. 물론 열심히 듣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힘든 기억, 부정적 인상만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다. 아이들은 그저 입시 공부가 힘들고, 주말에 입시와 상관없는 문학 강의를 듣는 게 달갑지 않으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깊은 상처를 받았나보다. 그날 그 2시간만큼은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이번 학기엔 좋은 일도 많았는데, 유독 그 끔찍한 고립감이 나를 붙들었다. 그제야 내 머릿속으로 이런 문장이 지나갔다. 인생이란 당신이 끔찍이도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전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오만 가지 생쇼를. 나는 지금 그 쇼를 연출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내 자신이 입장권을 한 장도 팔지 못한 연극, 그것도 아무에게 기댈 곳이 없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강의를 하다보면 가끔 반응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날은 왜 유독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었을까. 내가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주눅 든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도 때아닌 오기가 튀어나와서, 문학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것인지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 한다. 촌스럽게 이러지 말자, 나 자신을 다그치면서도 자꾸만 과도하게 진지해진다. 문학이라 불리는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단 한 명 남은 여행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절박해진다. 고칠 수 없는 배냇병 같다. 내가 사랑하는 것 앞에선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다. 고등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무관심 앞에 처절하게 KO패 당한 그날, 내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웠는지를 알게 되었다. 문학의 ‘문’자만 들어도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졸음이 달아나던 내 고교 시절과 달리, 그날 만난 고등학생들의 눈에선 어떤 초롱초롱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더 심해지겠구나, 앞으로 이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더 힘들어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 몸 전체를 감싸준친구의 메시지</font></font>아이들은 그저 ‘수업’을 태만히 한 것인데, 나는 그 아이들이 ‘내 삶’을 부정하는 것 같은 필요 이상의 고통을 느꼈다. 글을 쓰는 나, 여전히 문학을 동경하는 나, 강의할 때 극도로 긴장하며 마음 졸이는 나, 이 모두가 버릴 수 없는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2시간 동안 어떤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나라는 이유로’ 고통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이유로 고통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당신이 그저 자신이라는 이유로 고통받는다면 그건 얼마나 쓰라린 아픔이 될 것인가. 슬럼프의 치명적 허점은 바로 그것이다. 상대방이 내 마음의 ‘이곳’을 찌른 것이 아닌데, 꼭 여기가 아프다. 나의 콤플렉스니까, 그리고 콤플렉스가 모인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이 모인 장소이기도 하니까. 문학은 그 존재 자체가 내 트라우마이기도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영혼의 심장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를 직접 찌른 것도 아닌데, 나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내가 나를 아주 오래전부터 징벌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이유로,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마음의 슬럼프를 겪고 있는데,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 혜진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정말 느닷없는 안부였다. “여울아, 요새 네 책 읽고 있어. 어쩌다보니 네 책을 다 구해서 읽고 있었네. 너를 볼 수는 없지만, 네 글을 통해 위로받고 있단다. 우리 엄마도 어제 네 책을 빌려가셨어. 힘내렴, 친구.” 좀더 긴 편지였지만, 우리 둘만의 소담스러운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다 털어놓기는 차마 쑥스럽다.
아무튼 이것만은 고백할 수 있다. 친구의 따스한 안부 메시지가 마치 거대한 ‘대일밴드’가 되어 내 몸 전체를 감싸는 느낌이었다고. 나라는 형편없는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상처치료용 밴드가 빈틈없이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섬광처럼 서늘한 깨달음이 스쳐갔다. 늘 타인에게 뭔가 힘이 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나 또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는 것을. 겉으로 강하고 명랑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어쩌면 더욱 따뜻한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진정한 친구가 없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외롭고 무서웠던 나 자신에게도 격려가 필요했다는 것을. 때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내 소중한 우정이, 말없이 피어난 들꽃처럼 가만히, 늘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font size="4"><font color="#008ABD">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속마음을 숨겼을까</font></font>이제 강한 척, 괜찮은 척, 대수롭지 않은 척은 그만해야겠다. 나는 모든 것이 대수롭고, 모든 것이 안 괜찮으며, 단 한 번도 상처를 제대로 치유해본 적이 없다. 그게 나였다. 상처받았을 때는 묵사발이 되어버린 얼굴도 좀 보여주고, KO패 당했을 때는 그래도 강한 척 어설픈 연기 따위는 그만두고 아파 죽겠다고 투덜거리고도 싶다. 무엇보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땐 ‘도와달라’ 이야기하고 싶다. 마흔이 넘어서 참으로 좋은 건, 이렇게 솔직해져도 절대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이 두렵고 무서워서 그토록 내 마음을 숨겼을까, 내 젊은 날이 통째로 후회스러운 이 순간.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싶다. 우리 더 많이, 더 자주 서로의 안부를 애틋하게 물어가며 살자고. 제발 쿨한 척 좀 그만하자고. 그리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고백하고 싶다. 당신에게 소중하지 않은 것이라도, 타인에게 소중한 것이 눈에 띈다면, 그가 왜 그걸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지 한번쯤 눈여겨봐달라고. 인생이란 어쩌면 당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내게는 너무도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주장하고 고백하는 기나긴 여정인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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