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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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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과 남자는 길에서 줍는 거 아닌가요?

이혼파티에서 남자를 만나다
등록 2017-07-13 14:53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동전과 남자는 길에서 줍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자 그는 목젖이 두드러진 긴 목을 뒤로 살짝 젖히며 크게 웃었다. 언젠가 저 도드라진 사과를 깨물어주겠어, 생각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을 거슬러 올라가면 닷새 전 내 이혼파티에서였다. 경애하는 나의 이혼 선배가 제안한 자리였다.

예순둘에 이혼에 맞닥뜨린 그녀에게 친구들은 성대한 이혼파티를 열어주었고 “그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며 내게도 베풀어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여름을 맞아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고 이혼여행 또한 다녀온 이후라 파티는 조촐히 하는 걸로 결정했다. 존경하는 선배 한 분, 그분이 초대한 비혼 여성, 그리고 나의 오랜 친구 두 명이 모이기로 했다.

공기가 물처럼 흐물거렸다

장소는 파티 주최자의 아파트였다. 아득히 높은 천장,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한강 조망, 그리고 평범한 블라인드 대신 창밖 풍경을 분할하듯 설치된 한옥의 창호지문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룬 아파트 내부는 들어선 순간부터 나를 취하게 했다. 널찍한 거실 한쪽엔 각종 주류와 다채롭게 차린 음식으로 가득 찬 식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편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눴다. 모인 사람은 각기 개성이 강한 이들이었고 살아온 삶도 달랐다. 대학 때 만나 긴 시간을 연애하고 결혼한 뒤 세 자녀를 키워낸 예순둘에 이혼한 여자, 결혼 없이 올해까지 7년째 연애를 누리는 40대 후반 여자, 대학 때 만난 남자와 연애와 결혼 뒤 여전히 자녀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룬 50대 여자, 20대의 짧은 결혼 생활 후 이혼하고 다시 결혼해 10년차에 이른 딩크족 남자, 역시 대학 때 만난 연인과 결혼해서 우여곡절 결혼 생활을 유지 중인 남자, 그리고 나. 나는 프랑스 유학생 시절이던 20대의 마지막 해 프랑스 휴양지에서 열린 영화제의 길 한복판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남자와 파리와 미국을 오가며 연애하다 3개월 만에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13년 만에 이혼에 이르렀다.

우리가 전부는 아니었다. 잠시 후 테이블 너머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식탁 위를 가득 메운 푸짐한 요리를 혼자 준비했다며 그의 노고를 치하하는 파티 주최자의 멘트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페도라를 쓴 이국적 외모의 사내는 멀리서 얼핏 봤을 때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들어선 순간 공기가 물처럼 흐물거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흐르듯 유연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진 물의 남자였다.

존재를 파악할 때 나는 움직임을 본다. 경직된 동작이 있고 경직됨을 깨부수는 강력하되 또 다른 경직된 동작이 있다면, 그 사이를 흘러가는 액체 같은 움직임이 있다. 팔과 팔이 뻗고 고개가 돌아가고 시선이 움직이고 상체가 하체를 배반하고 이 모든 조합이 우연처럼 잘 맞아떨어져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발견하면 무대 위 주인공을 바라보듯 남김없이 눈에 담는다. 등이 굽지 않고 가슴이 넓게 펴진 자태만으로도 그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걸음과 함께 느슨하게 흔들리는 팔의 길고 우아한 움직임에는 단단한 훈련의 흔적조차 희미하게 보였다. 작은 얼굴과 넓게 펴진 어깨의 비율, 긴 팔다리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여유롭되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몸으로 자유롭고 몸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걸.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자

힘을 빼고 우아하게 걸을 줄 아는 남자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우리 곁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와인을 마시는 그의 손동작을 살폈다. 병을 쥐고 따르는 모습, 어깨가 기울어지는 각도, 손가락 길이 및 손의 크기, 반팔 너머로 드러나는 팔근육의 섬세한 움직임 같은 것을 말이다. 그는 이미 절정을 달리는 우리의 대화에도 물 흐르듯 쉽게 스며들었는데, 살짝 탁하면서도 울림 있는 목소리가 이색적이었다. 대화가 섞이면서 그와 잠시 시선을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맞춘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눈빛을 맞추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느끼함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유쾌한 집중력을 드러내는 시선이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인상적으로 볼 줄 안다는 건 경험과 자신감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는 적어도 내 또래쯤 되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가까이 바라보자 여기저기 시간의 흔적이 보였다. 이마 위로 잡히는 주름, 적당히 팬 볼, 부분부분 흐트러진 몸선이 드러났다. 잘 다듬었다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얼음 조각처럼. 흘러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흐르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그곳에 속한 어느 누구와도 달랐다. 잘 짜인 일상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몸으로 먼저 우뚝 서 있는 남자였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그의 존재가 있다는 건 모임 전체에 잘 뿌려진 토핑 같았다. 그리고 나는 기억해냈다. 오래전 나는, 몸의 남자들을 항상 아꼈다고. 움직이고 넘고 뛰어오르고 질주할 줄 아는 사람들은 나의 상상력을 저 끝까지 날아오르게 했다. 물론 오래전 이야기다. 결혼 이후로는 대신 나 자신을 좀더 몸의 인간이 되도록 벼려왔다. 몸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춤을 추고 근육을 단련하고 걷고 구르고 떨어지고 타고 오르며 몸의 감각을 캐는 일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나는 정해진 틀과 사고를 벗어나더라도 곧 제자리로 돌아가서 성찰하고 정리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몸의 즐거움은 정신의 숙취 같은 후회를 짝패처럼 달고 다녔다.

관찰이 관심이 되는 순간

그날 밤은 조금 더 특별했을까. 제각각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거대한 술통 속을 느릿느릿 헤엄치듯 초여름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알맞은 높낮이의 배경음악처럼 아득히 흘러갔다. 가히 스케일의 여자라 부를 만한 주최자는 오크통째 하우스 와인 두 통을 프랑스 와이너리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맛난 음식과 특별한 술이 거침없이 중심을 통과해 다시 원무를 그리듯 맴도는 이야기들 사이로 리듬감 있게 오갔다. 간만에 누려보는 적당히 사치스럽게 편안한 자리였다.

편안함의 결과는 자유분방한 대화와 관찰의 적절한 조합이었다. 그러나 세심한 관찰이 접근으로 이어지는 일은 흔치 않은 법이다. 관찰이 관심이 되기 위해서는 사건이 필요하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없으면 매력은 없다. 나와 이어지지 않으면 대상은 그저 대상일 뿐이다. 흥미롭고 흥미롭지 않다는 차이만 있을 뿐.

붉은 와인빛이 퍼져가는 저녁노을을 지나 검푸른 밤하늘이 펼쳐질 무렵, 방을 옮겨 차를 마시기로 했다. 술꾼들의 하프타임이었다. 거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커다란 원목 사각 테이블이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방이었다. 차를 마시며 들뜬 술자리의 흥분을 가라앉힐 즈음 페도라의 남자는 자리를 옮겨 와인을 더 가져왔다. 하나둘 찻잔을 비우고 다시 와인잔을 잡았다. 차츰 의식이 용해되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어느새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방금 따라 마신 차의 향기와 파티 주최자가 피워올린 사향의 황홀함과 10년을 익은 와인향을 지나 그의 체취가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가 응답하듯 내 손을 거머쥐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술을 마셨다. 잠시 후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당신, 냄새가 마음에 들어.”

자꾸만 뭉개지는 기억 속에서 어느새 그의 길고 뾰족한 코가 내 어깨와 팔을 더듬듯 훑고 있었다. 그는 거듭, 냄새가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 어깨에 희미한 자국도 남겼다. 깨무는 남자였다.

이틀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외국에서 온 절친한 친구 뮤지션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영어로 이어지는 술자리는 가볍고 유쾌했다.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질 무렵, 남자는 돌연 언어를 바꿔 한국말로 내게 물었다.

“그날 밤 내내 손잡고 있었던 거 기억해요?”

나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오갔다. 나는 곧바로 언어를 바꿔 세 사람의 대화로 흘러 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술집으로 이동하던 길, 그가 다시 물었다.

“정말 기억 안 나요? 신발장 앞에서 입 맞춘 것도?”

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난 그 순간이 정말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허탈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나가더니 뒤돌아 말했다. 시선을 지긋이 맞추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우리는 홍대 밤거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죠.”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날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고 그는 나를 숙소까지 바래다준 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저 멀리 달려나갔다.

밤과는 다른 낯으로

다시 이틀 뒤, 우리는 낮에 만났다. 전날 또 술을 마신 내게 해장시켜준다는 핑계로 우리는 복국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밤의 비호를 받지 않은 채 날것으로 드러난 대낮의 그는 색달랐다. 거침없이 솔직했고 때로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 역시 밤과는 다른 낯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복국집을 지나 한강변 카페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동전과 남자는 길에서 줍는 거 아닌가요?”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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