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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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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블링한 인형보다 슈퍼히어로가 좋은Girl

남아-여아 성역할 이분법 파괴한 레고…

국내선 여전히 낡은 기준의 장난감과 동요
등록 2017-07-06 17:27 수정 2020-05-03 04:28
(아래)국내 대형마트에서 인형·소꿉놀이는 여아용 장난감, 로봇·자동차는 남아용 장난감으로 나뉘어 있다. 레고코리아 제공, 인천여성민우회 청청기자단 오시연 제공

(아래)국내 대형마트에서 인형·소꿉놀이는 여아용 장난감, 로봇·자동차는 남아용 장난감으로 나뉘어 있다. 레고코리아 제공, 인천여성민우회 청청기자단 오시연 제공

핑크 vs 파랑.

여기는 어디, 지금은 어느 시대? 중학교 3학년 윤민희(15) 학생은 분홍과 파랑으로 양분된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순간 얼어붙었다. 학교에서 활발한 성격의 친구가 선생님에게 “여자애가 조신해야지” 라는 지적을 듣고 친구들이 억울해하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지연이가 블링블링하고 분홍색 좋아하는 건, 이 사회가 우리를 설계했기 때문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모는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있지”

윤민희 학생과 함께 인천여성민우회에서 청소년 기자단 ‘청청기자단’ 활동을 하는 오시연(15) 학생이 받은 느낌도 비슷했다. 기자단 활동으로 ‘대형마트 장난감 판매 성평등 실태조사’를 하러 평소 가지 않는 대형마트 아이들 장난감 코너에 갔다가 이상한 구별짓기에 놀랐다. 장난감 코너는 ‘남자아이 장난감’ ‘여자아이 장난감’으로 나뉘어 있었다. ‘남자아이 장난감’ 코너에는 자동차, 로봇, 비행기를 비롯해 직접 조립해서 만드는 전자시계, 탱크 등이 쌓여 있었다. ‘여자아이 장난감’ 코너에는 인형, 액세서리, 보석함, 소꿉놀이, 주방놀이 등으로 차 있었다. 인공지능이 바둑 두고 기사 쓰는 2017년에 꾸밈·돌봄은 여자, 만들기·조립은 남자와 연결하는 유통 대기업이라니. 청청기자단이 방문한 인천 지역 대형마트 6곳 가운데 5곳이 장난감 코너를 ‘여아’ ‘남아’ 표지판과 분홍·파랑으로 구별짓고 있었다.

오시연 학생은 미국의 7살 소녀 샬롯이 떠올랐다. 샬롯은 2014년 1월 덴마크 브릭 회사 레고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당찬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나는 레고가 좋아요. 그런데 마트에 가면 레고는 딱 두 종류로 나뉘어요. 분홍과 파랑. 그리고 여성 레고는 모두 집에 앉아 있거나 해변에 가고 쇼핑을 해요. 직업도 없어요. 그런데 남자 레고는 회사에 가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직업도 있고, 상어랑 함께 수영도 해요. 모험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소녀 레고도 만들어주세요.”

레고는 그해 2월 ‘실험실 시리즈’에서 여성 과학자 피겨를 처음 선보였다.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레고시티’ 시리즈의 경찰서, 정글 탐험 기지, 공사 현장, 해양 구조 현장 등에서 활동하는 여러 직업군에 여성 피겨를 포함했다. 2015년 미국의 만화 중심 미디어 기업 DC코믹스가 ‘슈퍼히어로 포 걸스’(superhero for girls)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선보이면서, 올해 초 레고도 ‘슈퍼히어로 포 걸스’ 시리즈를 출시했다. 배트맨·슈퍼맨 등 ‘맨’ 일색의 슈퍼히어로뿐 아니라 배트걸·슈퍼걸·원더우먼 등 세상의 절반인 여성도 슈퍼히어로로 당당히 활동하는 시대다.

그러나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장난감은 진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24개월 딸아이를 둔 송지은(30·가명)씨는 최근 선물받은 장난감 ‘뽀로로펜’ 때문에 한동안 걱정이 많았다. 이 장난감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펭귄 캐릭터 뽀로로가 그려진 전자펜을 그림에 갖다 대면 소리가 나는 책이다. 뽀로로를 좋아하는 딸아이는 이 장난감을 주면 10분이고 20분이고 즐겁게 논다. 문제는 내용이다. 아빠 그림을 누르면 “아빠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지”라고 하지만, 엄마 그림을 누르면 “엄마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있단다”라고 한다. 이모는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삼촌은 책을 들고 학교에 간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요리하고, 할아버지는 정원을 돌본다. 송씨는 전형적 성역할이 구분된 장난감을 아이가 갖고 놀 때마다 난감하다.

시대착오적 동요 가르치는 유치원
국내 기업이 개발한 장난감 ‘뽀로로펜’은 아빠는 회사 가고, 엄마는 차 마시고, 이모는 쇼핑하고, 삼촌은 공부하는 등 왜곡된 성 역할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레고는 최근 ‘레고시티’ 시리즈를 통해 서류가방 들고 회사 가는 여성, 잔디 깎고 페인트 칠하는 여성, 유모차 미는 남성 등 고정된 성역할을 타파하는 피겨를 선보였다. 류우종 기자

국내 기업이 개발한 장난감 ‘뽀로로펜’은 아빠는 회사 가고, 엄마는 차 마시고, 이모는 쇼핑하고, 삼촌은 공부하는 등 왜곡된 성 역할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레고는 최근 ‘레고시티’ 시리즈를 통해 서류가방 들고 회사 가는 여성, 잔디 깎고 페인트 칠하는 여성, 유모차 미는 남성 등 고정된 성역할을 타파하는 피겨를 선보였다. 류우종 기자

성역할 고정관념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더 강화된다. 김윤정(36·경기도 고양·가명)씨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와 대화하다 깜짝 놀랐다. 블록으로 이전과 다른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어서 “와, 멋지다” 칭찬해줬더니 돌아온 대답은 “엄마, 여자아이한테는 예쁘다고 해야지”였다. 김씨는 “엄마는 네가 만든 게 멋지다는 거였어. 그리고, 멋지다는 건 누구한테나 할 수 있는 말이야”라고 넌지시 덧붙였다. 딸아이는 “선생님이 그랬다”고 한 차례 반박하고선 다시 블록에 코를 박았다.

며칠 뒤,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와서 흥얼거리는 노래에 아연해졌다. “내가 커서 어른 되면 어떻게 될까. 아빠처럼 넥타이 매고 있을까. 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 등 예쁜 동요를 많이 만든 김성균 동요작가의 이라는 곡이지만, 이 곡은 엄마와 아빠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부적절한 노래였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이지형(40·가명)씨도 유치원 참여 수업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가족참여수업’은 평일은 엄마가 참여하고 주말인 토요일에는 아빠가 참여하는 것으로 구성됐다. 엄마는 전업주부로, 아빠는 일하는 것으로 가정한 결과다. 수업 내용도 엄마와는 발표·한글·숫자를, 아빠와는 보드게임·체육활동을 하도록 구성했다. 실내활동은 여성, 실외활동은 남성과 짝짓기한 셈이다. 유치원 벽에 붙은 아이들의 그림을 보자 유치원이 아이들의 성별 고정관념을 교정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했다. 그림만 보면, 여자아이 그림인지 남자아이 그림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그린 그림 속 ‘나’는 모두 네모난 눈에 동그란 보석이 박혀 있고, 치마를 입었다. 함께 그린 것은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었다. 남자아이가 그린 그림 속 ‘나’는 모두 바지를 입고 공룡 등 크고 힘센 동물을 타고 있었다.

현재 유치원에서 하는 성인식 교육과 관련해선 10여 년 수준에서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 유아교육에서 성역할 관련 연구는 대략 2008년께 멈춰 있다. 1998년 정부 6개 부처에 설치된 여성정책담당관실이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 일제히 없어진 것과 관련 있다는 분석이다. 교육부에도 여성정책담당관실이 성평등 연구나 정책을 집행해왔지만 2008년 이 조직이 사라지면서 성평등 관점의 교육정책을 적극 실행하는 주체가 사라졌다. 정해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에 관련 부처가 없으니 유아교육에서 성인식을 모니터링하고 성평등 관점의 교재를 개발하는 활동이 멈췄다. 10년 전만 해도, 유치원 곳곳에서 ‘신데렐라’ 같은 동화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읽는 등의 프로그램이 활발했지만 주무 부처가 현장에선 교사들이 내면화한 왜곡된 성인식이 자연스레 스며나와 아이들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퇴행적 교육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남·여 구분에 갇힌 아이 구출하기

교사들은 ‘아차’ 하는 반응이다. 경력 10년차 유치원 교사 김은미(40·가명)씨는 “ 같은 노래를 가족 역할을 주제로 활동 프로그램을 짤 때 하던 대로 포함시켜서 아이들에게 지도했다”고 말했다. “생일 선물을 줄 때도, 여자아이에게는 소꿉놀이를 주고 남자아이에게는 의사놀이를 주는 등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편견을 심어주고 있었다.” 어린이집 교사 황지영(45·가명)씨도 “여자아이의 이름표는 밝고 따뜻한 색으로, 남자아이는 푸른색 계열로 쓰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기르는 방식은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자아이들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남성성을 협소한 의미로만 정의합니다. 남성성은 좁고 딱딱한 우리와 같고, 우리는 그 속에 남자아이들을 밀어넣습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움츠리라고, 자신을 위축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성공을 목표로 삼아도 괜찮지만 너무 성공해서는 안 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우리 안에 갇힌 아이들을 어떻게 구할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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