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의 진동으로 이뤄진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이 흐르면 공기 진동도 사라지고, 당연히 음악도 사라진다. 오래전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음악을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부유한 귀족은 음악가를 집에 들이거나 공연장에서 라이브로 즐겼다. 전문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을 악보에 기록했다. 민초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음악을 듣거나 직접 불렀다. 그들의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1877년 미국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세계 최초의 축음기 ‘포노그래프’를 발명했다. 소리통에 대고 말하거나 노래하면 이에 연결된 바늘이 공기 진동으로 떨리면서 회전하는 원통을 감싼 은박지에 자국을 남겼다. 이 자국에 다시 바늘을 대면 녹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디슨은 자신이 만든 축음기에 대고 동요 (Mary had a little lamb)를 불렀다. 유튜브에서 노래 제목과 에디슨 이름을 검색하면 140년 전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음악 듣는 워크맨의 시대소리를 기록하는 신기술은 그야말로 시간을 붙잡아두는 마법과 같았다. 이후 은박지 대신 밀랍을 씌운 원통을 이용한 축음기 ‘그라포폰’ ‘그라모폰’ 등이 개발됐다. 그러다 나온 것이 깨지기 쉬운 밀랍 대신 석유에서 추출한 PVC로 만든 LP 레코드판이다. LP는 ‘Long Playing’의 약자로, 서양에서는 LP 대신 재료를 뜻하는 바이닐(Vinyl)을 주로 쓴다.
데이비드 색스의 책 을 보면, 상업용 LP판은 1931년 미국 음반사 RCA빅터가 처음 소개했다. LP가 본격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8년 컬럼비아음반사가 지름 12인치 레코드판을 내놓으면서다. 12인치 판은 분당 33과 3분의 1회 회전(rpm)으로 45분간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다. 이는 LP판의 표준이 되었다. 1년 후 RCA는 45rpm 속도로 8분 분량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7인치 EP(Extended Playing) 싱글판을 선보였다.
12인치판과 7인치판은 대중음악가들이 노래를 발표하는 고정 포맷이 됐다. 이런 식이다. 히트할 만한 곡을 7인치 싱글판에 1~2곡 담아 발표한다. 이런 싱글판을 1~2장 낸 뒤 여기에 다른 신곡을 더해 12인치 판으로 낸다. 이게 바로 정규 앨범이다. 정규 앨범이 45분 분량의 10곡 안팎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건 음악을 담는 매체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이런 음악 발표 형태는 매체가 바뀐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1962년 필립스는 작은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테이프 릴과 테이프를 넣은 콤팩트 카세트테이프를 개발했다. 1979년 소니가 최초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을 출시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즐기는 시대를 열었다. 카세트테이프는 LP와 달리 원하는 곡만 듣기 어려운 구조였다. A면 첫 곡부터 순서대로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세트테이프로 앨범을 듣다보면 히트를 겨냥한 타이틀곡 말고 숨은 보석 같은 곡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음악가들도 이 사실을 잘 알아 모든 수록곡에 정성을 쏟았고, 곡 순서 배치에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무형 디지털 음반의 중간 어디쯤1983년 소니와 필립스는 공동 개발한 CD(Compact Disk)를 내놓았다. 0과 1로 이뤄진 디지털 신호로 음악을 저장한 CD는 깔끔한 음질에 버튼 하나면 원하는 곡을 골라 들을 수 있는 편리함, 휴대성까지 갖춰 10년도 안 돼 음반 저장매체 시장을 장악했다. 사람들의 벽장을 차지하던 LP와 카세트테이프는 CD로 급속히 대체됐다.
영원할 것 같던 CD 전성시대는 역설적이게도 CD의 강점인 디지털 속성 때문에 무너졌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디지털로 변환한 음악을 굳이 물리적 매체에 담아 유통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MP3 파일을 온라인으로 주고받으면 그만이었다. 손쉽게 음악을 내려받는 시대에 굳이 비싼 돈 주고 CD를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대 변화를 받아들여 어떤 음악인은 CD 대신 USB에 음악을 담아 내놓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USB 음반은 CD, LP 같은 물리적 매체와 온라인을 타고 다니는 무형 디지털 음반의 중간 어디쯤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지드래곤이 발표한 앨범 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온라인 발매와 동시에 CD 대신 USB 음반으로도 발표했는데, 이게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음악파일을 저장한 기존 USB 음반과 달리 USB에는 음악파일이 없다. 대신 USB를 컴퓨터에 꽂고 연결된 사이트로 가서 기존 CD 케이스 모양의 USB 음반 케이스에 적힌 시리얼번호를 입력하면 음악과 사진, 가사, 뮤직비디오 등을 내려받을 수 있다. 라벨을 인쇄한 빈 CD를 케이스 안에 넣어두고 이를 산 사람이 직접 음악을 저장하라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음반은 충분히 낼 수 있다. 에디슨의 축음기부터 LP, 카세트테이프, CD를 거쳐온 것처럼 이를 USB가 대신했을 뿐이다. 그리고 구입한 사람이 직접 내려받아 넣으라고 했을 뿐이다. 어차피 요즘은 음악을 물리적 매체에 저장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원 사이트에 접속해 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오프라인 음반을 산다는 건 소장 때문일 것이다. USB 음반을 사서 음악을 내려받은 뒤 곱게 모셔놓고, 실제 감상은 음원 사이트로 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논란은 음반과 음원 판매 순위를 집계하는 ‘가온차트’ 쪽에서 을 음반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데서 비롯됐다. 음악파일이 USB 안에 있으면 음반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에는 파일이 없으므로 음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논리만 보면 그럴듯하다. 이걸 음반으로 인정하면 음악을 내려받는 인터넷 링크를 적은 종이쪽지도 음반으로 봐야 한다는 다소 비약적 논리가 나오는데,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LP면 어떻고 CD면 어떻고 USB면 어떠냐논란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음반인지 아닌지가 중요한가? LP면 어떻고 CD면 어떻고 USB면 어떻고 그냥 디지털 파일이면 어떤가? 그 안에 뭐가 담겼는지가 중요하지 어떤 그릇에 담았는지가 중요한가? 이런 논란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드래곤 신보의 비평과 논쟁을 다 잡아먹는 듯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서 당신은 을 어떻게 들었냐고? 기대에 못 미쳤다. 실망했다. 그 얘기를 좀더 하고 싶지만, USB 음반 논란 얘기를 하느라 지면을 다 채우고 말았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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