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JTBC가 야심차게 내놓은 드라마다. 지난해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로케이션으로 촬영이 시작된 뒤, 한류 스타 박해진의 액션 연기 등으로 기대를 모았다. 과연 첫 회는 굉장한 스케일과 긴장감을 보여줬다. 국제 테러를 진압하던 특수군 김설우(박해진)가 국가정보원 해외파트 요원이 되고, 철옹성 같은 감옥에서 요인을 탈출시키는 등의 장면이 빠르게 이어진다. 매 장면에서 박해진의 멋짐이 묻어 있다. 국내에서 돌아가는 상황도 흥미롭다. 재벌 3세로 송산그룹을 물려받은 모승재(연정훈) 회장은 유력 정치인(천호진)과 커넥션을 유지하며 뇌물과 협박으로 다른 정치인을 길들인다. 여기에 글로벌 스타 여운광(박성웅)을 둘러싼 대형 연예기획 산업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에서 주로 악역을 담당해온 배우 박성웅이 매력적인 캐릭터 여운광에 캐스팅된 것도 의외의 재미를 더한다.
동성과 이성의 사랑이 위계 없이 공존하다웅장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진지한 첩보액션물이 아니라 코미디에 가깝다. 김설우에게 지령을 내리는 이동현(정만식)이 등장하는 장면이 별스럽게 코믹하다 싶더니, 김설우가 국내로 들어온 뒤에는 장르가 급선회한다. 드라마는 ‘스파이 로맨스’라는 복합장르를 표방하지만, 결국 로맨틱 코미디에 속한다. 그것도 동성과 이성의 사랑이 위계 없이 공존하는 기묘한 삼각관계를 주축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김설우는 죽은 국정원 요원이 남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배우 여운광의 경호원으로 잠입한다. 여운광은 대작 히어로물에 출연하는 글로벌 액션배우로 스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하다. 흡사 천송이 캐릭터의 남성 판본이라 할 만큼 묘한 매력과 귀여움을 지닌다. 그의 곁에는 팬클럽 출신 매니저 차도하(김민정)가 있다. 그는 “우리 오빠”에 대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빠심’을 가졌다. 경호원으로 여운광의 곁을 지키게 된 김설우는 차도하와 필연적으로 부딪친다. “요원에게 로맨스는 훌륭한 위장술”이라 믿는 김설우가 차도하에게 둘러댄 말이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여운광은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김설우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둘 사이는 급격히 친해진다. 김설우 역시 차도하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셋은 물고 물리는 애정의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이성과 동성이 섞인 애정의 고리라니, 이상한가? 드라마는 이성관계와 동성관계에 위계와 차등을 두지 않고 그린다. 즉 이성 간 애정은 진지하게 다루고, 동성 간 애정은 장난처럼 다루지 않는다. 둘 다 동등한 가치와 밀도를 지니는 감정이기에, 서로에 대한 견제와 질투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선에는 위계와 금기가 따라붙는다. 즉 김설우와 여운광은 틀림없는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류는 우연적이거나 일회적일 뿐이며 동성애가 아닌 ‘브로맨스’일 뿐이라고 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브로맨스는 ‘브러더’와 ‘로맨스’의 합성어로, 남성들 간 우애가 마치 연애 감정처럼 진하고 애틋할 때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대단히 애매하고 포괄적인 용어가 아닐 수 없다. 당장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하면 최근작만 해도 등 수많은 작품이 줄줄이 딸려온다. 이 작품들 속 인물관계에 온도차가 큰 것은 물론이고, 같은 작품 안에서도 훈훈한 형제애를 보여주는 장면과 후끈한 동성애가 감지되는 장면이 교차한다. 이런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브로맨스라는 지칭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브로맨스’라는 부정의 알리바이그것은 일종의 시치미다. 동성 간에 진한 애정을 느끼는 일이 드물지 않음을 알고 그 감정을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면서도, 동성애는 아니라고 부인할 때 ‘브로맨스’라는 용어를 쓴다. 이때 브로맨스란 말은 둘 사이에 성관계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 이성애 관계에서 로맨스와 섹스는 연속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동성애 관계에선 로맨스와 섹스를 분리한 뒤, 동성애를 동성섹스의 의미로 한정해버린다. 그 결과 동성애는 혐오와 금기의 대상이 되지만, 브로맨스는 부담 없고 무해한 것으로 변주되고 감상된다. 요컨대 브로맨스란 용어는 동성애 금기를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다. 대중문화에서 브로맨스니 ‘남남 케미’가 넘쳐나는 가운데, 정작 동성애의 존재와 감정은 지워지고 부인된다.
한동안 등 남장 여자를 둘러싼 로맨스를 통해 금기를 건드리지 않고 동성애 감정을 말하는 드라마가 유행했다. 실컷 게이 로맨스를 묘사해놓고 사실은 주인공이 여자였으니 이성애라고 봉합하거나, 표면상으로 갓 쓴 남자와 기생의 사랑이지만 누가 봐도 여자임이 확연한 문근영의 외모로 인해 여성들 간의 곡진한 사랑으로 감상되는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연막을 사용하지 않는다. 동성 간의 진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되, 동성애는 아니라고 시치미를 뗄 뿐이다. 하지만 에서 이요원과 유이, 에서 황정민과 이정재의 감정을 단순히 ‘걸 크러시’니 ‘브로맨스’라는 말로 퉁쳐버릴 수 있을까. 왜 그들은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돼야 할까. 그들을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로 놓고 감정을 따라가면 안 되는 걸까. 섹스 유무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동성애나 양성애는 얼마나 흔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인가.
어떤 정치보다 중요한국정원과 재벌의 정치 개입이 등장하는데다, 국제 테러 등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드라마의 핵심 갈등이 동성애와 이성애가 공존하는 삼각 로맨스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어떤 정치적 의제보다 ‘퀴어 정치학’의 중요성이 결코 낮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대선 국면에서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TV토론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답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틀 뒤 군대 내 동성애 허용을 반대한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군대 내 동성 성관계와 동성 성폭력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며칠 뒤 사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군인의 합의된 성관계는 간섭할 수 없으며,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은 반인권적 수사라는 견해를 내놓은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혹자는 극소수에 불과한 성소수자의 문제가 왜 대선 국면에서 이토록 큰 이슈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극소수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들과 엄연히 존재하는 감정을 마치 없는 것처럼 말소해온 체제의 동조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극소수가 아니다. 어디나 존재한다. 퀴어를 퀴어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노릇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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