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시마 사고 전에도 원전의 위험을 경고한 영화들이 있었다. (2004)는 도쿄 도지사가 재정 확충을 위해 도쿄에 원전을 유치하겠다고 제안하는 설정을 담은 블랙코미디다. 원전이 그렇게 필요하고 안전한 것이라면 도쿄 한가운데 짓자는 역설을 통해, 원전을 떠받치는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영화는 후쿠시마에서 도쿄로 전기를 끌어오느라 손실되는 전력이나 송전탑 문제까지 언급하며, 지진 대국에서 원전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게 기적이라는 뜨끔한 말까지 곁들인다. 또한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날 경우 방사능 오염 지역의 예측 범위까지 보여주어, 후쿠시마 사고를 예견한 듯한 뼈아픈 메시지를 담는다.
후쿠시마 이후 금기된 원전 문제후쿠시마 사고 후 일본에서 원전 문제를 다루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이런 기류를 뚫고 소노 시온 감독은 ‘후쿠시마 3부작’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중 한 편인 (2012)는 가까운 미래에 또다시 원전사고가 난 상황을 그린 극영화다. 목축업을 하며 평화롭게 살던 다이히코의 집 옆으로 대피선이 그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강제 이주한다. 다이히코는 치매에 걸린 아내와 집에 남고, 아들 부부만 집을 떠난다. 폐허가 된 마을에 남아 고립된 생활을 하는 노부부는 오히려 평온하다. 반면 대피 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아들 부부는 방사능 공포에 시달린다. 원전 상황이 악화되어 다이히코도 강제 이주될 상황에 놓이자, 노부부는 함께 죽기를 택한다. 영화의 제목은 극히 역설적이다. 이토록 절멸의 공포가 잠재한 나라에서 희망이란 결국 함께 죽기를 각오했을 때나 가능한 것 아니냐는 반문을 담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2015)은 예외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5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블록버스터로, 테러의 위협을 받는 원전을 그린다. 1995년 원격조종이 가능한 신형 헬기가 테러범에 의해 탈취된다. 헬기에는 어린이 한 명이 타고 있었는데, 테러범은 헬기를 원전 위에 띄우고 전국의 모든 원전을 정지시키지 않으면 폭발물이 담긴 헬기를 추락시키겠다고 협박한다. 당국은 아이를 구출하고 테러범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테러범은 원전에서 하청노동을 했던 사람과 원전의 책임기술자였다. 하청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원한이 있고, 책임기술자는 반핵운동에 영향을 받은 급우들에게 왕따를 당해 죽은 아들로 인해 분열적 상태에 놓여 있다. 영화는 뚜렷한 반핵 메시지를 갖기보다 원전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일깨우는 측면이 강하다. 영화는 말미에 헬기에서 구출된 아이가 자라 자위대 조종사가 되어 2011년 구호 활동을 하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후쿠시마 사고와 연결고리를 만든다. 영화는 원전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하기보다, 일심협력해 아이를 구하듯 재난을 극복하자는 뉘앙스를 미묘하게 앞세운다. 이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금기가 된 원전 문제를 대중적으로 다루기 위한 타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하고 영화제 상도 거머쥐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미래후쿠시마 사고는 가장 인접국이자 원전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도 충격을 안겼다. (2013)는 후쿠시마 사고와 체르노빌 사고를 짚으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다큐멘터리다. 후쿠시마 주민들은 자신이 겪은 사고의 실체를 알기 위해 체르노빌로 떠난다. 사고 당시 인구 5만의 첨단 도시였던 체르노빌은 폐허가 되어 있다. ‘핫스폿’에서는 여전히 허용치의 300배가 넘는 방사선량이 검출된다. 강제 이주된 주민의 상당수가 얼마 후 사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자식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후쿠시마의 미래’라는 제목은 죽음의 땅이 된 체르노빌이 바로 후쿠시마의 미래이자, 핵발전에 기댄 현대문명의 미래임을 암시한다.
(2016)는 한반도 남쪽에 규모 6.1의 지진이 발생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그린 대규모 재난영화로, 450만 관객을 동원했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제작에 돌입해 4년간 제작된 뒤, 투자가 끊겨 1년 이상 개봉이 늦춰졌다. 2016년 12월에야 개봉할 수 있었는데, 시기가 절묘했다. 그해 가을 경주에 규모 5.8의 지진이 일어났고 청와대의 끔찍한 추문이 드러났다. 영화는 원전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국에서 원전사고가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별다른 과장 없이 리얼하게 그린다. 실제로 고리원전 30km 반경에 340만 명이 살고 있으며 대피 방법이 전혀 없다. 영화에서 원전보다 큰 위험으로 등장하는 사용후핵연료가 원전 내부 수조에 30년째 보관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전 내부의 우왕좌왕이나 정부의 무능하고 비민주적인 대처도 현실적이다. 영화 속 대통령은 지도력을 상실하고, 이를 대리한 총리는 주민 격리와 언론 차단을 지시한다. 정부는 주민들을 체육관에 몰아놓고, 원전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찰은 문을 잠근 채 도망친다. 원전에 바닷물을 퍼부어야 하는 상황에서 원전을 망가뜨리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소방 작업을 지체한다. 영화에서 공동체를 구하는 것은 대통령도 원전 소장도 소방대장도 아닌 평범한 노동자다. 국가는 국민을 책임지지 않지만, 평범한 이들이 가족과 이웃과 동료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다. 이는 한국 재난영화의 전통이자, 판도라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평범한 시민들의 헌신과 연대에 있음을 전하는 의미심장한 결말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015)은 김기덕 감독이 일본 배우들과 초저예산으로 찍은 극영화로, 개봉 시점에 맞춰 IPTV로 공개되었다. 후쿠시마에 살던 미키 부부는 원전사고 직후 강제 이주된다. 도쿄에 온 부부는 기관원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기관원은 미키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낙태를 종용한다. 불안감에 휩싸인 미키가 낙태하려 하자 남편이 막아선다. 남편은 후쿠시마 동물들이 무사한 것을 찍어오겠다며 미키를 묶어놓고 떠난다. 그러나 그는 끔찍한 것을 보게 된다. 광기에 휩싸인 임신부가 낫을 든 채 홀로 출산하고 낫으로 목을 긋는 장면은 미키가 느끼는 불안의 또 다른 판본이다. 남편은 후쿠시마 동물들의 고기를 도쿄 술집에 파는 남자를 발견한다. 후쿠시마 주민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전기를 펑펑 쓰는 도쿄 시민들에게 복수하려는 것이다. 남편은 그와 함께 도쿄를 블랙아웃 시키기 위해 송전탑을 파괴하는 직접행동에 나선다. 기관원이 부부에게 “깨끗해지자” “원전은 필요하다” “당신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이다”라며 낙태를 종용하는 모습은 사고의 책임을 축소하고 결과를 은폐하려는 정부의 태도를 은유한다. 미키는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든 그것은 우리가 만든 결과이기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언한 뒤 후쿠시마로 돌아가 홀로 출산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천배나 뛰어난 청각으로 고통받는다. 미키의 준엄한 선언과 아이의 예민한 청각은 영화의 주제를 드러낸다.
한국에서 원전사고가 일어난다면 그 미래가 어떤 괴물의 모습이든, 위험을 알면서도 경고의 나팔 소리에 귀를 막아온 우리들의 책임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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