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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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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투’를 외치다

여성 판사의 활약 그린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직장 내 성희롱과 남성 법관들 카르텔 꼬집어
등록 2018-06-07 13:10 수정 2020-05-03 04:28
열혈 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은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꾼다. JTBC 제공

열혈 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은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꾼다. JTBC 제공

(JTBC)는 여성 판사의 활약을 그린 법정 드라마다. 현직 부장판사인 문유석 작가가 2015년 5월부터 10개월간 토요판에 연재한 소설 가 2016년 책으로 나왔다. 문유석 작가가 이를 직접 각색해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검사나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 드라마는 많았지만, 판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드물었다. 정적이고 폐쇄적인 판사 사회를 드라마로 담기에 어려웠기 때문이다. 첫 시도였던 은 과장되고 유치한 표현으로 혹평을 받았다. 반면 는 사실적 묘사와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법과 정의가 충돌하는 지점에 대한 섬세한 고찰과 젠더 문제에 대한 선연한 의식이 가치를 발한다.

정의감과 젠더적 각성을 품다

약자를 향한 정의감과 젠더적 각성을 품은 주인공의 활약이 감동과 통쾌함을 안긴다. 하지만 도덕과 감정에 호소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법과 정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정의감만으로 공정한 판결에 이를 수 없음을 냉정하게 성찰한다. 민사합의 44부를 구성하는 세 판사들은 이름도 특이하다. 열혈 판사 박차오름(고아라), 그를 견제하고 지지하는 모범생 판사 임바른(김명수), 부장판사 한세상(성동일). 특이한 이름은 캐릭터와 작가의 뜻을 담는다. 박차오름은 정의감과 감성이 벅차오르는 성격이고, 임바른은 싸가지 없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며, 한세상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 현실타협적 인물로 비친다. 하지만 줄여서 ‘오름’이라 부르는 박차오름은 궁극적인 ‘옳음’을 표상한다. 임바른은 ‘바른’ 논리와 과정을 제시해주며, 한세상은 세상을 넓고 깊게 보는 통찰을 일깨운다. 드라마는 이들의 논쟁을 통해 섣부른 정의에 도취되거나 타성에 젖은 행위가 놓치는 지점이 무엇인지 짚는다.

이를테면 500만원의 채무를 모두 갚았다는 할머니와 돈을 못 받았다는 채권자 사이의 송사를 보라. 법에 무지해 보이는 할머니에게 동정심을 느낀 박차오름은 전화로 사실관계를 묻는 실수를 저지른다. 할머니는 대번에 ‘판사 아가씨’가 먼 친척이라는 거짓말로 채권자를 압박한다. 약자를 위한다는 선의만으론 공정성을 지킬 수 없음을 말해주는 일화다. 하지만 박차오름은 선배들이 잊고 있던 재판부의 역할을 일깨우기도 한다. 고깃집 사장과 손님 간의 지루한 분쟁을 두고 한세상은 “정의도 한정된 자원”이라며 조정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하지만 박차오름은 아무도 승복하지 않는 합의는 의미가 없다며 시비를 더 가리려 한다. 그는 ‘오십보백보’라며 퉁치는 논리의 안일함을 지적하며, 피고와 원고를 직접 신문한다. 마침내 진실이 밝혀진다. 여기에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얽혀 있었다. 피고와 원고는 진심 어린 이해와 사과에 이르고 고소는 취하된다.

하지만 이런 기적의 순간은 드물고, 법과 정의가 모순을 일으키는 일이 훨씬 많다. 박차오름의 돌출 행동은 윗사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다. 판사의 ‘튀는’ 행동이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는다는 말을 단지 기득권의 논리로 흘려들을 수만은 없다. 박차오름의 튀는 행동이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신뢰받지 못하는 판단자’로 치부될 위험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박차오름이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출근 첫날 지하철 성추행범을 응징하는 동영상이 ‘판사’라는 직함과 함께 SNS를 타고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구설을 못마땅하게 여긴 한세상이 피해자의 짧은 치마를 탓하자, 박차오름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출근해 법원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한세상이 호통치자, 박차오름은 니캅(눈만 내놓고 베일로 얼굴 전체를 가리는 이슬람권 여성 복식)을 착용하고 나타나 ‘성추행이 남성의 성욕을 유발하는 여성의 옷차림 탓’이라는 한세상의 논리를 받아친다. 이처럼 해학적이고 시의적절한 장면들은 이미 원작에 있던 내용이며, 덧붙인 것이 있다면 지하철 추행범에게 “약한 남성이라고 불쾌한 일을 참지 말라”는 말로 ‘미러링’(타인의 행동을 거울에 비춰 똑같이 따라 하는 것)의 양념을 더 뿌린 정도다.

국가 통치성 들여다보려는 텍스트

드라마는 미러링을 자주 활용한다. 박차오름은 동료 남성 판사들을 ‘이모’(여성 상인)들이 포진한 재래시장에 데려가 성희롱을 경험해보도록 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미러링을 현실과 혼동하는 순진함을 범하지 않는다. 직장 내 성희롱을 엄벌하는 판결을 내린 것에 여성들은 “법이 우리를 지켜준다”며 환호하지만, 밤거리에서 남성들에게 둘러싸이자 모르는 남성들 틈에 숨을 만큼 위축된다. 심지어 그 여성이 법원 경위를 맡은 무술유단자라는 사실은 젠더 권력 관계가 엄존하는 현실을 환기한다.

드라마 속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최근 ‘미투’ 논의를 압축한 듯한 통렬함을 지닌다. 성희롱 사건이 터지자, 회사는 여론을 의식해 가해자를 즉각 해고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해고무효소송에 패소하려고 한다. 또한 직원들이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2차 가해를 한다. 그 결과 피해자와 가장 가까운 동료마저 가해자를 두둔하는 증언을 한다. 하지만 판사의 집요한 질문이 이어지자, 돌연 자신도 가해자에게 똑같은 피해를 당했다며 폭로한다. 이를 보던 가해자 부인마저 변호사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며 폭로하자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는 2017년 한샘성추행사건이나 올해 2월부터 불이 붙은 ‘미투’ 운동이 연상되는 장면이지만, 원작소설에 이미 등장하는 내용들이다. 이는 작가가 최근 이슈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선견지명으로 시대를 꿰뚫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는 두 가지 의미에서 시대정신을 관통한다. 첫째는 여성 주인공의 영웅서사라는 점이다. 예컨대 1980년대 의 장총찬이 하던 역할을 박차오름이 한다. 최고의 남성 엘리트는 단지 조력자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성별 계급의 모순을 체현한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성별 계급을 넘어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장하려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주체로 남성을 세울 수 없기에, 그는 영웅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둘째는 법과 국가기구 등 통치성의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동시대적 욕구가 반영된 텍스트라는 점이다. 등 경찰, 검사, 변호사, 판사 등을 다룬 드라마가 최근 급증한 이유가 뭘까. 이는 정권교체 후 국가권력에 대한 달라진 사유를 반영한다. 즉 경찰, 검찰, 법원 등 국가기구를 저항과 비판의 대상으로 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활용하고 교섭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국가기구를 한 덩어리의 폐쇄된 블랙박스가 아니라, 그 안에서 밀고 당기는 힘들이 무수히 교차되는 생물로 보려는 시도다. 이를 통해 내부 개혁을 하려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거나, 인적 물갈이로 구조가 바뀔 수 있는지 알려는 시민사회적 욕망이 존재한다.

정의가 벅차오르는 시대 맞으려면

는 적어도 한 가지 팁을 준다. 근래 신규 임용 법관의 절반이 여성이고 성적도 매우 우수하다. 그러나 아직 여성 법관은 전체 법관의 28%에 불과하다. 위로 갈수록 남성 법관들의 카르텔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미스 함무라비’는 온몸으로 말한다. 소수자 보호와 실질적인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직문화가 바뀌어야 하며, 이를 위해 여성 법관의 승진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그와 함께 정의가 봇물처럼 벅차오르는 시대를 맞고 싶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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