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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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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불편한 ‘아는 남편’

맞벌이 부부의 리얼한 삶 그린 <아는 와이프>

남편의 반성 담은 착한 텍스트 아니다
등록 2018-09-04 07:04 수정 2020-05-02 19:29
30대 맞벌이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라마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tvN 제공

30대 맞벌이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라마 <아는 와이프>의 한 장면. tvN 제공

(tvN)는 힘든 결혼생활로 ‘괴물이 된 아내’에게 환멸을 느끼던 남자가 과거를 바꿈으로써 다른 삶을 맞는 ‘타임워프’(시간의 흐름을 과거나 미래로 옮기는 현상)물이다. 남자는 바뀐 삶을 통해 잊고 살았던 아내의 매력과 미처 몰랐던 아내의 고충을 알게 된다. 그러곤 아내가 괴물처럼 변한 것이 자기 탓이라는 반성에 이른다. 이런 서사는 언뜻 윤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에는 반성을 빌미로 괴상한 ‘남성 판타지’를 늘어놓는다.

드라마는 첫 회부터 맞벌이 부부의 리얼한 삶을 보여준다. 결혼 6년차인 차주혁(지성)과 서우진(한지민)은 지옥 같은 일상에 허덕인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서우진은 뒤늦게 나타난 차주혁에게 욕을 퍼붓는다. 하지만 차주혁도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맞벌이로 아이를 키우는 30대 부부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반성의 우스꽝스러움

여기서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을 풀어나갈 것인지를 천착할 필요가 있지만, 드라마는 이런 현실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곧바로 판타지를 통해 다른 삶으로 옮겨간다. 차주혁은 ‘시간의 톨게이트’를 지나 서우진을 처음 만났던 2006년으로 가서 곤경에 처한 여고생 서우진을 돕는 대신 짝사랑하던 음대생 혜원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혜원의 남편으로 살고 있는 바뀐 삶으로 깨어난다. 이런 식의 판타지는 나쁘지 않다. 현재의 결혼생활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때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 마련이다. 또한 나 처럼 다른 삶을 체험해 소망 충족의 쾌감도 얻고 반성과 깨달음에 이르는 서사는 유구하다.

드라마는 부잣집 딸인 혜원과 결혼한 차주혁의 행복한 모습을 비춘다. 또한 다른 삶을 사는 서우진을 직장 동료로 만난 차주혁이 이전 삶에서 잘못한 점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아내의 외로움을 알지 못했고, 직장 일을 핑계로 처가 일에 무심했음을 깨닫는다. 회식에서 김건모의 를 부르며 회한에 젖는 차주혁의 모습은 그런 반성의 우스꽝스러움을 보여주는 절정이다. 드라마는 남편의 반성을 담은 착한 텍스트로 보면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드라마는 반성하는 남자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철저하게 남자의 시각으로 이루어졌다. 시간의 톨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결정적인 사건은, 서우진이 차주혁의 게임기를 부순 것이다. 퇴근한 차주혁이 좁은 옷방에 쭈그리고 앉아 게임하는 모습이나 게임기를 사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모습은 차주혁에게 게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다. ‘남자의 소중한 취미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바가지를 긁는 여자’라는 ‘여성혐오’의 구도가 TV(, 2015)나 영화(, 2015)을 이어 재현된다.

아내에게 독박육아시키는 ‘한남’

하지만 이는 ‘독박육아’의 역상이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서우진은 집안일을 시작한다. 차주혁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아내에게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하소연할 때나, 아내에게 “회사보다 집에 오는 것이 더 피곤하다”고 퍼부으며 나가버린 밤에도 서우진은 두 아이를 돌봐야 했다.

차주혁은 바뀐 삶에서 자신의 두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한참 만에 알아챈다. 그에게 아이들은 힘든 노동의 대상이었을 뿐 언제나 그리운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며 “내가 천벌 받을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때마침 천둥이 치자 “죽을 뻔했네”라며 놀란다. 반성의 제스처만 취할 뿐, 진정한 통한이 아닌 것이다.

다른 삶을 상상하는 판타지에서도 차주혁의 시각이 우주의 중심을 이룬다. 통상 타임워프물에서 바뀐 삶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자체 논리를 지닌다. 예컨대 바뀐 삶에서 서우진과 차주혁은 이전에 만난 적이 없으므로, 기억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우진 엄마는 차주혁을 “차 서방”이라 부르며, 서우진도 꿈을 통해 차주혁에 대한 어렴풋한 기시감을 갖는다. 바뀐 삶에서도 차주혁과 서우진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는 차주혁의 인식이 바뀐 세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관점이다.

바뀐 삶에서 차주혁은 혜원과 결혼했다. 그런데 타임워프된 차주혁은 혜원과 쌓아온 정이 없다.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기이하다. 차주혁은 어느 날 아내를 낯설어하며, 직장에서 만난 서우진에게 애틋함을 느낀다. 차주혁이 서우진의 남편으로 충실하지 못했음을 뉘우치는 동안, 그는 혜원의 남편으로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맞벌이 남편일 때 아내에게 독박육아를 시키는 ‘한남’이었듯이, 부잣집 사위가 된 그는 아내에게 며느리 노동을 요구하고 직장 동료와 외박하는 등 ‘한남’ 짓을 한다. 드라마는 차주혁의 외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혜원을 악역으로 만든다. 혜원은 연하남과 놀아나고, 며느리 노동을 거부하며, 서우진을 사이버상에서 비방한다. 이는 시청자의 공분을 일으키려는 의도적인 설정이다.

드라마는 차주혁과 서우진의 특별한 감정을 당연한 듯 그리지만,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보면 파렴치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부잣집 딸과 결혼해 처가의 지원으로 사는 남자가 가부장적 의식을 버리지 못해 아내에게 며느리 노동을 요구한다. 그는 출신 계층이 다르고 자신보다 관계 우위에 있는 아내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다. 그는 자신을 “대리님”으로 부르는 명랑한 미혼 여성에게 계급적 동질감을 느낀다.

음흉한 유부남 판타지를 전시한다

차주혁은 서우진에게 특별한 감정을 투사한다. 그가 치매 노인과 공유하는 망상은, 서우진이 가장 힘들 때 자신이 함께 있어준 ‘오빠’이자 미운 정 고운 정이 담뿍 든 “전남편”이라는 것이다. 서우진의 처지에서 차주혁의 태도는 얼마나 이상한가. 처음에는 텃세를 부리듯 불편하게 대하다가,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어느 날 내 집 근처를 배회하고, 나에 대해 뭔가를 많이 아는 듯하고, 이따금 나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듯 불쑥 친근한 말을 던지고, 자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런 차주혁의 태도는 알게 모르게 서우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고, 마음을 흔든다. 이런 선배, 선생, 상사 등 관계 우위에 있는 유부남의 질퍽하고 모호한 태도가 젊은 여성들의 감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종종 있다.

드라마는 마침내 이혼당한 차주혁에게 서우진이 사랑을 고백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이쯤 되니 집안에서 기가 눌린 유부남들이 직장에서 만나는 여성들에게 ‘오빠 판타지’를 구현하고 싶어 하는 구린 욕망과 그런 정신적인 지배와 교란에 의해 사랑인 양 착각하는 여성들의 곤경이 오롯이 떠오른다. 드라마는 남자의 반성을 그리는 듯하지만, 사실은 음흉한 유부남 판타지를 전시한다. 참으로 역겨운 드라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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