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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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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복잡한 관계망을 성공의 증거로 여기지 않는 똑똑한 거리두기
등록 2017-04-07 19:1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그동안 우리 삶에서 거품처럼 부풀려 생각하게 된 것 중 하나가 인간관계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이다. 특히 관계망을 가져야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그런 관계를 통해 성공한 사람도 있다. 그들은 ‘성공=사회적으로 아는 사람 수’라는 등식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즉, 스마트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전화번호가 입력됐는지가 자신의 성실한 사회 활동을 증명하는 바로미터라고 여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향적이지만 건강한 내면</font></font>

적지 않은 사람이 사회적 관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잘못 행동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교적이고 언변에 능하고 농담 잘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잘 적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그런 성향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 자신에 대해 불안감과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나라 리더들 중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은 불필요한 관계보다 자신에게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한다.

예전에 한 부모가 밖에 나가면 통 말을 하지 않는 아이 문제로 찾아온 적이 있다. 아이를 만나 심리검사와 상담을 진행했다.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아이에게 왜 말을 적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이에게서 “나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좋은 것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부모에게 “아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더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즘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에 열중하는 사람이 많을 때 반대로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은 남다른 덕목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덕목이 장차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되리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제야 부모는 환한 얼굴로 돌아갔다.

과거 라디오 방송을 진행할 때 이야기다. 그 방송국에는 불평불만을 떠뜨리기 위해 전화하는 청취자를 100% 해결하는 PD가 있었다. 그는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끝까지 들어주었다. 상대의 목소리가 작아지면 그때부터 조용조용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면 청취자도 자신이 지나쳤다고 사과하며 전화를 끊었다. 무엇보다 PD의 태도는 주위에 안정감을 주었다. 현재 그는 리더가 되어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PD 역시 일반적 관점에서는 언변에 능하거나 사교적 유형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것을 고민하는 모습은 못 봤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러 그런 면을 걱정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font size="4"><font color="#008ABD">성공한 사람을 안다고 성공한 게 아니다</font></font>

앞서 말한 아이의 부모도 자신들은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자꾸 문제라고 말하는 바람에 불안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이든 상대방이든 뭔가를 하지 않으면(그것이 단지 말수가 적은 것일지라도) 뒤처진다고 생각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계속 사회적 관계망에 있지 않으면 게으르고 뒤처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은 내 행동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로운 사람, 도움되는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려 한다. 즉, 내 편에서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알아두어야만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자기 아이를 유명 사립학교에 보내면서, 그래야만 나중에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 물론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인맥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만나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면서 서로 친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대를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는 인간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행여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누군가와 어울리면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 시간에 자신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망에 집착하는 두 번째 이유는 과시욕 때문이다. 성공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을 마치 내가 그 사람의 영역에 들어간 것으로 착각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일로 다투는 부부를 본 적 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인맥이 넓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명절 선물을 받곤 했다. 그러자 배우자가 질투를 하게 되고 사소한 다툼으로 번져 다른 것까지 트집을 잡다보니 본의 아니게 갈등 상황에 놓이더라는 것이다. 명절 때 누구에게 선물을 보내고 받는지가 한 개인의 위치를 말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편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에 따라 쉽게 스러지는 관계일 뿐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되어야 </font></font>

사회적 관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알아두는 것이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필요할 때 무언가를 부탁하려면 많은 사람을 알아두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요즘처럼 많은 것이 세분화된 사회에서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조언해주는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복잡한 세상에 내가 존재함을 알리는 것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언젠가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아서’라는 목적으로 만나는 모임이나 관계가 과연 건강한지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늘 말하지만, 우리 몸 자체가 관계이고 삶 자체가 관계이기 때문이다. 뭐든 지나치면 문제다. 인간관계도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목적을 위한 관계라면 문제가 된다.

내 삶을 돌아봐도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도움은 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받았다. 목적이 있는 사람 관계는 내가 어떻게 해도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있다. 사회적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으면 내 편에서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망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몰두할수록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쓸데없이 부풀어오른 관계망 속에서 거품을 빼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인간관계에서 적절하게 거리를 둘 줄도 알아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옷차림이 달라야 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것을 ‘똑똑한 거리두기’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상대를 기분 좋게 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과 내가 내 편에서 원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일단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선을 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선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선택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상대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는 시간에 차라리 나의 발전에 더 신경 쓰는 것이 현명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나와 지내는 시간도 필요해 </font></font>

나무를 너무 빽빽하게 심으면 자랄 수 없다. 나무를 제대로 키우려면 적절하게 베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해주면서 여백을 줘야 한다. 너무 많은 인간관계에 함몰해 있으면 정작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바라는 만큼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똑똑하고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거품을 걷어내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과 지내는 시간만큼 나와 지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편이 오히려 나의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양창순 마인드앤컴퍼니 대표·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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