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어느 날의 일이다.
어머니 손맛이 실린 밥상에 코를 박고 있던 나는 TV 뉴스에서 들리는 소식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흡사 전쟁영화에서나 봄직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도 땅 광주에서 폭도들이 들고일어나 국가전복을 도모한다는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는 아주 다급했다.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는 상을 물린 뒤에도 TV 앞을 떠나지 못했다. 총 들고 거리를 장악한 저들의 행동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런 나쁜 놈들! 대체 왜들 저래?”
‘광주 사태’로 명명된 온갖 신문·방송의 보도를 그대로 믿은 내게 한동안 그곳은 무서운 폭력배들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빠지는 호흡그로부터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2013년 10월 마지막 날. 나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한 초로의 남성 곁에 서 있었다.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진행 중인 사진치유 프로그램 참가자 9명 중 한 사람인 그는 아주 오래도록 멀리해왔다던 어느 골목길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평소 느릿느릿한 말투도 사라지고 힘겹게 내뱉는 말도 끊기거나 막혔다.
“여, 여그여! 여그가 내, 내가 잡힌 곳이여~!”
광주 금남로의 옛 도청 광장 인근 전일빌딩 계단 앞에서 황의수(63)씨는 주체할 수 없이 뒤틀리는 심정을 토로했다. 잠시 몸과 정신을 추스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저만치서 ‘손들어!’ 하고 계엄군들이 나한티 총을 겨누고 섰더만. 뭐 어떡하겄어. 피할까 순간 고민도 했는디 암만 혀도 총알이 빠르겄더라고. 두 팔 번쩍 드니께 그대로 날아와서 군홧발로 걷어차더라니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속 두 눈동자는 그의 몸처럼 초점 없이 흔들렸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혀를 돌려 연신 침을 묻히기도 했다. 아까부터 그의 모습을 지켜본 나는 폭도들이라 욕했던 철없는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올라 한없이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였다.
“바로 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디 바닥에 머리 박고설랑 계속 얻어맞응게 참말로 이대로 죽는구나 싶더라고.”
그는 1980년 5월27일 새벽 차가운 돌계단에 팽개쳐져 무방비 상태로 군홧발과 곤봉 세례를 무참히 받아야 했다. 머리가 짓이겨지는 고통 속에 죽음 문턱까지 왔다는 극심한 공포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자존감까지 처절하게 잃어버린 황씨는 그날 이후 오래도록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의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전일빌딩 앞 골목길과 계단은 스스로 정한 금기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오래도록 외면하고 회피해온 것은 물론 근처에 갈 일이 있어도 멀리 돌아가기 일쑤였다. 머리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심각한 불안 증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날의 기억을 가슴에 묻고 애써 잊으려 했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홀로 두려움에 떨다가 스스로 삶을 거두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여러 달에 걸친 마음의 준비 끝에 그 자리를 찾아가던 날, 황씨 손에는 작은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두 팔을 들어올렸다. 움직임 없이 서 있던 자리에서 몇 컷의 셔터를 누르는 동안 카메라는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반듯하게 세우라고 권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황씨 또한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초보 사진가의 기본 구도인 수평과 수직에 대한 개념은 이럴 때 아무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의 순간 감정에 기대어 있는 그대로 행하면 될 일이었다.
33년 만에 용기를 내어 두려움의 장막을 걷으려 나온 자리였다. 내재된 두려움과 정면으로 거의 처음 마주하려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 앞에 서는 일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자리에 나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나가기 위해 카메라를 든 것이다.
응시해야 치유된다치유의 도구로서 사진은 우선 자신의 ‘행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들로 산으로 찍을 ‘꺼리’를 찾아나서는 것과 다름없이 잊을 수 없는 고통의 기억도 하나의 ‘꺼리’이자 스스로 마음을 들여 살펴야 할 ‘대상’ 그 자체다. 몸에 난 상처도 직접 눈으로 보며 치료 수위를 정하듯 마음에 드리워진 상처 역시 살피고 보듬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내면에 깊숙이 감추었던 마음의 상처는 그것과 마주하는 용기를 통해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 외부의 간섭이나 권유가 아닌 스스로 이루어낼수록 훨씬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황의수씨는 여전히 몸을 떨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굉장히 몰입해 있는 모습이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어떤 의식을 치르는 비장함마저 돌았다. 33년이라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심연 속에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일부를 세상 속으로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황의수씨가 용기 내어 바라본 것은 계단이 아니라 상처받고 내동댕이쳐졌던 바로 자신이다.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아주 특별한 순간을 그는 1만3천여 일이나 보낸 뒤에야 드디어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몇 개월이 흐른 이듬해 초봄 어느 날. 한결 가벼워진 표정의 황씨가 꽤 흥미롭다는 듯 말을 건넸다.
“임 선생. 그 계단을 자주 가서 보니께 인자 편안해지더구만요. 엊그제는 날 쏘려고 했던 계엄군이 있던 자리에서 그 계단을 찍어보기도 혔소. 하하하.”
그는 처음 찍었던 사진과 달리 바로 정면에서 반듯하게 찍은 계단 사진을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함께 찾아간 날 이후 홀로 꾸준하게 그 앞을 찾은 황씨는 어느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면서 오랜 시간 품어온 두려움의 실체를 제법 덜어내게 되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카메라 사이에 둔 양자 대면고통의 기억과 대면하며 ‘수용’이라는 인지적 변화를 이룬 그는 오히려 불의에 항거했던 자신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고 기쁘게 말을 이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끌어올린 듯 그의 웃음은 당당했다. 오래전부터 조심스레 즐겨오던 바다낚시나 산행의 자리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머지 8명의 5·18 피해자들 역시 황씨와 엇비슷한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자기 회복의 시간을 치러냈다.
황의수씨가 새로이 인식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내면에 잠식된 상처 입은 영혼으로서의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면서 그는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까. 굳이 묻어둔 상처를 끄집어내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구든 기억 속 상처 앞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외면과 회피의 세월이 이미 녹록지 않거니와, 아픔과 고통의 시간 역시 그만큼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하지만 아무리 딱딱하게 굳은 채 깊숙이 묻힌 상처라 해도 스스로를 살피는 자위적 노력 앞에선 ‘넘사벽’이 될 수 없다.
그 상처의 본질과 직면함으로써 사진 행위는 치유의 도구로서 구실을 할 수 있다. 사진 행위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둠의 그림자를 스스로 걷어내기 위한 역동이자 ‘빛’ 안으로 드리우려는 내면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과 과거를 헤매는 자신이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이루는 양자 대면은 사진 행위가 이룰 수 있는 치유 영역 안에서 아주 중요하다. 사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이루는 대면 행위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 아이’를 살피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국가폭력이나 그에 준한 상황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개인의 일상이 훼손되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한다.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그 시스템의 허술함이나 사회적 인연과 여러 관계 안에서 쉽게 마음을 다치거나 흔들리게 될 여지를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때 입는 내적 상처를 떠올리기 싫다는 이유로 기억 저편에 묻어두는데 이는 감정의 형태로 오래 남게 된다. 그 감정을 하나의 사물이자 대상으로 재인식하는 것을 일종의 구조화 작업이라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사진 행위는 자기를 살피는 치유적 도구로 활용하기 용이해진다.
어떤 ‘대상’ 앞에 서야만 사진이 하나의 결정체로 구현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눈앞의 구체적인 형상만이 아닌, 내면에 드리워진 ‘감정’이라는 대상과 직면해 치유의 역량을 스스로 구현해낼 수 있다. 카메라를 든 이가 바로 자신일 수밖에 없듯이, 내면에 잠식된 기억 또는 상처로 점철된 감정과 마주함으로써 그것을 프레임에 담고 덜어내는 자위적 행위를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극복할 힘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치유와 위로는 외부의 힘이 아닌 바로 자신의 기운으로 이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필요한 준비물은 상처 앞에 당당히 서려는 ‘용기’다.
상처 앞에 당당히 서는 용기광주를 오간 지 어느새 3년이 훌쩍 넘었다. 여름과 겨울 한 달씩 쉬는 날을 빼고 매주 수요일이면 대부분 광주행 KTX에 몸을 싣는다. 36년 전 황의수씨를 비롯해 불의에 항거하며 광주를 지킨 시민군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던 내가 이제 그들 곁에서 삶의 일부를 나누고 있으니 종종 웃음이 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왜 그들의 곁에 서 있으려는 것일까. 상식을 뒤집는 어이없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요즘 문제도 아닌, 오랜 과거의 사건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 역시 종종 궁금하다.
아마 그들이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을 볼 때마다 그 용기에 반해서이지 않을까.
글 임종진 사진심리치유자사진 황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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