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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야’ 인증 강요 시대

스스로 인증해야 타인에게 인정받는 SNS 시대의 강박
등록 2017-03-31 16:18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사진 공유 애플리케이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밤하늘의 별과 같은 해시태그(#, 분류를 위한 꼬리표)가 우수수 떨어진다. #헬스타그램, #X맛탱, #X예, #살찔각, #인생샷 등 이미지에 뒤따르는 단어들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해시태그 수는 이미지 이상으로 늘어났고, 한 장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여러 개의 해시태그가 달리는 것이 일반화됐다. 상황에 따라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기 위해 사용되던 해시태그는 원래의 형태와 기능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를 해시태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코멘트 전부를 해시태그화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강원도 주문진의 한 드라마 촬영지를 찍은 사진에 ‘#도깨비촬영지 #김고은빙의 #날씨가안좋아꿀꿀 #촛불끄면공유나오나요’와 같이 단어가 아닌 반(半)문장 형태의 해시태그를 연이어 붙인다.)

진짜를 증명하려는 또 다른 진짜

해시태그는 음식점 간판에 붙은 ‘30년 전통의 진짜 원조 중 원조’란 수식어처럼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세계가 진짜라고 강조한다. 어떤 연유로 한 장의 이미지를 수식하는 해시태그가 이토록 많아진 걸까? 해시태그가 이미지를 보는 사람이 보려는 대로 보지 못하도록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보는 사람이 이미지 생산자의 언어가 이끄는 대로 인정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아닌가? 몇 년 새 엄청나게 늘어난 인스타그램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붙은 해시태그 사이를 부유하며 문득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인증 전쟁’을 벌이는지 궁금해졌다.

이미지를 통해 인증하려는 욕구, 즉 이미지가 사실임을 증명하려는 욕구는 사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최초로 영구적 사진이 만들어진 1827년 이후 사람들은 ‘본다는 것’과 ‘보는 실재를 재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진이 대중화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회화가 곧 눈으로 보는 것, 그리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회화 안에 화가 개인이 보는 대상뿐 아니라, 당시 사회의 눈이 향한 곳도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카메라라는 ‘제2의 눈’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카메라의 기계적 속성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인간의 눈이 뷰파인더(viewfinder)의 힘을 잠시 빌릴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무엇보다 사진이 어떤 극사실적 묘사보다 대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에 감탄했다. 그렇게 사진은 회화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 자리매김해나갔다.

발터 베냐민은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작품이 가진 고유한 속성인 아우라(aura)가 사라짐을 염려했다. 베냐민 같은 20세기 초반의 엘리트 지성인들은 사진이 결코 (복제 불가능한) 원본의 미학을 넘어설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대중의 눈은 사진이 내포하는 진위(authenticity)를 향했다. ‘원본의 아우라’라는 고매한 가치보다 사진에 담긴 진짜 대상이 복제돼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음에 주목했다.

대중의 기대를 업고 오늘날 사진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 눈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을 대신 봐주는 수준에 이르렀다. 의료 사진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몸의 상황을 알려주고, 폐회로텔레비전(CCTV) 사진은 안전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우리 또한 스스로 불미스러운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혹은 그저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이러다보니 사진은 우리 눈을 대신하는 순간을 넘어 우리 눈보다 더 믿을 만한, 진짜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실재임을 알면서도 기계적 이미지를 통해 어떤 사실이 있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나의 존재를 설명하려는 인증샷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실재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이미지도 ‘진짜’인지 인증받는 대상이 됐다. 이를 위해 요즘 활용되는 게 해시태그(#)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박근혜 게이트를 ‘#나와라최순실’이란 해시태그(사진)로 사건을 ‘재인증’한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실재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이미지도 ‘진짜’인지 인증받는 대상이 됐다. 이를 위해 요즘 활용되는 게 해시태그(#)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박근혜 게이트를 ‘#나와라최순실’이란 해시태그(사진)로 사건을 ‘재인증’한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아이러니한 건 기계적 이미지도 조작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카메라라는 기계의 과학적 중립성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결국 카메라를 매개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사진의 역사에서 논란의 중심에 선 사진들은 대부분 그와 관련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진에 담긴 장면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 이것이 어떤 종류의 사실인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사진 프레임 밖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사진가가 특정 프레임을 선택한 이유(사진가가 주장하려는 바)는 무엇인지 하는 질문들이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디지털화와 함께 가속화한 사진 조작술의 발전은 보이는 것의 진위 여부에 한층 까다로운 선별 과정을 요구했다. 포토숍을 위시로 한 이미지 편집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실재하지 않은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들고, 사진이 꼭 실재를 재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고도 늘어났다. 그럼에도 사진은 여전히 그 어떤 재현보다 믿을 만한 것으로 영향력을 주고 있다. 이는 조작 가능성보다 사진의 증거능력이 (아직까지는) 더 힘을 발휘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시각적 증거로서 사진은 2000년대 들어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를 맞이한다.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그리고 자발적 참여문화가 기폭제가 되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진을 찍는 기계가 나왔고, 이렇게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고 공유하는 서비스가 제공됐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일반 대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여러 도구를 활용하는 장이 마련됐으니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졌다. 사건의 존재, 순간의 존재, 심지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도 시각적 인증 절차가 당연하게 포함됐다.

‘좋아요’ 강요하는 사회

다른 한편으로, 인증(하는) 문화가 강화된 배경에는 사회적 변화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웹으로 전세계가 연결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관심이 향한 반경은 오늘날보다 상대적으로 좁았다. 가족과 친구, 집과 직장 정도가 일상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웹은 우리가 직접 알지 못하는 수많은 존재와 우리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해주었고, 그 연결이 비록 느슨하고 약할지라도 그 자체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결의 놀라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수그러들었고, 연결망 내에서 인정받는 존재로 살아남는 게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웹으로 연결된 공동체 안에서 너도나도 자기 존재를 적극 드러내기 시작했다. 믿을 만한 방식으로 인증하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건 현실보다 가상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금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스스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적극 수집해야 하는 시대에 발맞춰 진화한 SNS는 시각적 인증에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인증하는 자아와 이를 인정하는 타자는 상호작용의 인터페이스 안에 묶여 댓글과 ‘좋아요’를 증여받고 또 증여한다.

이런 인정이 일종의 보상 기제로 작동하는 시스템 안에서 타인의 시선은 절대적 위치에 선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타인의 시선을 붙잡아두기 위해 여러 면모의 나를 전시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타인의 인정을 애타게 기다리며 자아를 극단적으로 인증하는 사례는 종종 ‘관종’(‘관심종자’의 줄임말로 관심을 끌기 위해 극단적 연출을 하는 대상을 일컬음)으로 폄하된다. 관심을 갈구하는 누군가보다 그가 관심을 갈구하도록 만든 시스템이 정작 더 문제적일 수 있기에 보기에 따라서는 편향된 표현이라 할 수도 있다. 특히 사회 구성원 모두가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스스로 연출하고 있음을 냉정히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렇다.

자존과 관종 사이에서

지금 사는 순간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 또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임이 틀림없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시각중심주의’는 내가 보는 것을 빠짐없이 인증하라고 부추긴다. 이와 결탁한 SNS도 자신의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인증해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무명씨들의 무덤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설득한다. 시각과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인증함으로써 인정받는 일상은 반복될지 모른다. 피하지도, 그렇다고 즐기지도 못할 인증-인정의 연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조용히 지켜볼 일이다.

강보라 영상학 박사·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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