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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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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인간은 좀 곤란합니다

탈육체화된 기계와 소통에서 오히려 위로를 얻는 사람들
등록 2017-03-04 12:4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장면 1. 2015년에 방송된 일본 드라마 (問題のあるレストラン)의 치카는 극중에서 사람과 대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20살의 프리터(freeter,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다. 첫 등장에서부터 그녀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는다. 말을 걸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치카는 손을 뻗어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휴대전화에서 차가운 기계 음성이 흘러나올 뿐이다.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다. 거리감을 가져주세요.”
장면 2.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에는 사만다라는 이름의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테오도르가 등장한다. 그는 사람들을 대신해 카드나 편지를 써주는 일을 하며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이미 다 써버렸는지 모른다고 탄식하던 인물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주로 음성을 통해 소통할 뿐이지만 사만다의 인지 능력은 음성적 한계를 가뿐히 넘어 테오도르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다른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상대를 만났다고 확신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그의 전처는 날이 선 한마디를 던진다. “당신은 진짜 감정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1970년대 ‘엘리자 효과’

굳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혹은 ‘로봇이 인류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접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매일 기계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제 기계는 직접 나사를 조이고 기름칠해주기 전까지 인간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무생물이라기보다 인간을 대신해 말을 해주거나 인간과 유사한 인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생물에 가깝다. 하루하루 진일보하는 기계의 면모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요즘, 기계의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시점, 즉 특이점(singularity)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과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예언이 어느 때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기계가 인간의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아니, 인간이 기계를 일상에 들이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 가운데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다. 인간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전부였던 시기에 등장한 여러 도구·기계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적 거리를 점차 좁혀주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인간-인간 커뮤니케이션, 인간-기계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사물인터넷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기계-기계 커뮤니케이션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애플의 시리(Siri)나 아마존의 알렉사(Alexa) 같은 인공지능 음성서비스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인 1970년대에도 이들 서비스처럼 지능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다. 셰리 터클은 (Alone together)에서 1970년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엘리자(ELIZA)라는 이름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접했던 당시의 일화를 소개한다.

엘리자는 현재의 인공지능이 구현하는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문장을 질문으로 바꾸는 정도의 수행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MIT 학생들은 엘리자가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친구 또는 가족과 겪고 있는 문제를 털어놓았다. 엘리자의 반응은 여전히 기초적인 수준이었는데도 학생들은 엘리자를 점점 인격적인 대화 상대로 여기기 시작했다.

터클은 이를 인간이 기계와 맺은 일종의 공모 관계로 여기고 ‘엘리자 효과’(ELIZA effect)라 이름 지었다. 말하자면 엘리자 효과란 기계(엘리자)의 성질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인간이 (인간이 될 수 없는) 기계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함을 지칭한다.

인터넷 로맨스가 이상적인 이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도 엘리자 효과를 꾸준히 경험해왔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에 일었던 ‘다마고치 열풍’이나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심심이’, 그리고 최근 대중화되고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와 로봇이 바로 그 예다. 기계를 매개로 한 가상의 상대가 애완동물, 채팅 상대, 비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기꺼이 그 대상에 우리와 같은 인격을 부여해왔다. 비록 다마고치를 직접 만질 수 없고, 심심이의 진짜 얼굴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기계-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심화는 두 가지 특징을 동반한다. 우선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탈육체화하는 경향이다. 기계-인간 커뮤니케이션 이전 시기의 인간에게 커뮤니케이션 대상이란 물리적인 육체를 지닌 존재였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을 직접 대면하거나 편지, 전화 등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계-인간 커뮤니케이션에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대상은 반드시 육체화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일례로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인터넷상의 로맨스가 현실의 그것보다 이상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탈육체화에 있다고 보았다. 즉,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현실의 육체를 지워버림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더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처럼 탈육체화된 커뮤니케이션의 이상적 측면을 경험한 현대인은 커뮤니케이션 대상의 물리적 특성을 크게 따지지 않게 되었다. 글의 도입에서 소개한 사례에서 보듯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반드시 인간일 필요가 없다는 마음, 나아가 차라리 인간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까지도 생겨난 셈이다.

능동성 가진 것은 인간일 뿐

기계-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심화가 불러온 두 번째 변화는 상호작용(interactivity)의 이면에 있다. 인간-인간 커뮤니케이션이 질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말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시간에 비례하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인간인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에는 일정한 탐색과 탐색 결과에 근거한 행위가 포함된다.

문제는 인간-인간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절대적인 탐색 방식도, 그에 따라 예측 가능한 결과도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이 상대인 인간에게 A라는 행위를 하더라도 (상대에게 기대했던) A¹이라는 행위를 되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확정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인간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발생한 행위의 불확정성은 또 다른 인간-인간 커뮤니케이션을 무력화하는 기제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기계-인간 커뮤니케이션에서는 행위의 불확정성이 적을 뿐 아니라, 설사 발생했다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가짐에 차이가 생긴다. 앞서 엘리자 효과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애초 다른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기계에 똑같이 적용하지 않고, 기계의 반응에 대해서도 인간의 반응보다 훨씬 유연한 태도를 지닌다. 이처럼 인간이 기계에 대해 능동적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상호작용이라기보다 불완전한 형태의 유사 작용(pseudo activity)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다. 즉, 기계-인간 커뮤니케이션에서 능동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일 뿐, 기계는 인간의 능동성에 대한 수동적 행위를 내놓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온전한 상호작용으로 보기 어렵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기계를 초대한 이래 우리의 삶은 생각지 못한 속도로, 또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보라 부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재앙으로 부를지 모른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기계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기계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 선조들이 열 길 물속보다 한 길 사람 속이 알기 어렵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은 기계의 마음(기계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마음)보다 알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때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어야 하는 끊임없는 타협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입력하는 대로 산출되는 기계적 마음의 시대로 기꺼이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타인과 기계를 넘어 기계에 투사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기계의 마음이란 결국 우리 인간이 입력한 마음 그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what do we want to want)?”라고 묻는 유발 하라리의 질문이 자못 묵직하게 다가온다.

강보라 영상학 박사·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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