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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저녁, 광장마다 촛불이 들꽃처럼 피어오를 때 슬그머니 이 ‘휴방’을 결정한 건 우연한 겹침이 아니라 과학적 판단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어떤 광장은 TV의 적(!)이다. 물론 TV는 24시간 열려 있지만 광장은 상시적일 수 없다. 광장은 들고 나는 ‘터미널’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광장을 향할 순 없기에 진짜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그다음에 찾아온다. 폭발 이후 찾아올 탈진. TV는 모두가 광장에 서느라 자신을 외면할 때, 광장 이후의 위로와 유희를 준비해야 하는 매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밖에 없는광장의 역동성이 평범한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100일을 훌쩍 넘은 때, 비범한 제목의 드라마가 도착했다. (MBC, 이하 역적)이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진부한 이름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런데 역적이라니, 백성을 훔쳤다니, 대체 누가 도적인가. 한참 뒤틀린 제목이다. 그래서 얼핏 숱하게 변주된 홍길동 이야기로 재빨리 시류에 영합하려는 전략으로 읽혔다. 맞았다.
은 분명 홍길동(윤균상)의 이야기다. 그런데 첫 회부터 현재까진 완전히 뒤통수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 은 홍길동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모개(김상중)의 일대기다. 우리가 아는 홍길동의 아버지는 분명 그런 사람이 아닌데, 김상중은 좋은 배우이지만 당분간 촛불집회가 끝난 매주 토요일 밤 “그런데 말입니다”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혼란스럽다.
드라마이니까 그럴 수 있다. 초반이 강렬한 드라마도 숱하다. 그런데 범상치 않다. 홍길동이 이뤄야 할 것들을 아모개는 이미 다 이뤘다. 그걸 모두 보여주고 제2막이 시작됐는데, 홍길동이 끝내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벗어난들 그 세계가 아버지가 이룬 성취보다 더 빛날지 회의감이 든다.
홍길동의 슬픔에 자꾸 외로운 연산군(김지석)이 덧대어지는 느낌도 기묘하다. 홍길동과 연산군은 분명 강렬한 병렬로 마주해야 옳다. 이야기의 흐름상 그럴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30부작 내내 뒷심이 달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둘은 흡사 직렬회로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홍길동이 아버지의 세계를 넘어서지 못할 걸로 보인다면, 연산군은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입구와 출구가 연결된 한 우물에서 따로 허우적대는 꼴이다. 홍길동이 ‘형이라 부르지 못한 그 형’은 바로 연산군인가. 그래서 틀렸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아는 홍길동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홍길동을 내세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은 모든 것을 이룬 세대의 다음, 그 자식들의 이야기다. 의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울분을 삼키는 개인 홍길동이 아니다. 연산군 시절 실존했던 의뭉스런 도적이 아니고, 허균의 에 등장하는 의젓한 의적과도 상관없다. 의 홍길동은 차라리 우리가 흔히 보는 행정 양식에 예시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 홍길동이다. 누군지 모르나 누구이기도 한, 대명사로서의 누구. 광장의 들꽃인 바로 우리. 은 촛불 광장 ‘다음에 발생할 사건’에 대한 은근한 우화다.
권력도 영광도 누리지 못할 세대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의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다. 그냥 부르는 정도가 아니다. 이미 아버지가 이룬 것을 승계하려 애쓴다. MBC 홈페이지
흉내도 쉽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던 아모개의 아우라가 걷히고 홍길동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은 때, 풋풋한 홍길동은 노회한 관료의 시험에 직면한다. 어릴 적부터 연산군을 보필한 내관은 “그놈이 역사인지 아닌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겠지”라고 말한다. 아니란 뜻이다. 여기서 역사(力士)는 ‘뛰어나게 힘이 센 사람’, 장수다. (드라마에서 홍길동은 1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아기장수’의 운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 발화의 맥락은 분명 ‘역사’(歷史)다.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세계(나라)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역사’다. 아버지 세대의 신하였던 내관은 홍길동을 냉소한다. 이건 드라마니까, 우리는 그가 틀렸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현실에 대입하면 어떨까. ‘그래서 세대는 정말 진화할 수 있는가’ 혹은 광장에 견줘 ‘그래서 촛불은 승리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겠는가.
이 ‘역사’의 전개를 앞두고, 은 무려 7회에 걸쳐 아버지 시대의 영광과 업보에 관한 거대 담론을 깔았다. 대대로 노비일 수밖에 없는 씨종 아모개는 제 주인인 양반을 죽였다. 삼족을 멸한다는 강상죄다.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권력에 저항하는 실천적 삶을 이미 아버지는 살아냈다.
아비가 천륜을 어기는 걸 지켜본 소년 홍길동은 씻을 수 없는 윤리적 상처를 떠안았다. 그래서 홍길동의 과제는 새로운 세상의 건설이 아니다. 아버지가 만든 부조리를 해소하고 자신도 약간 맛본 영광을 계승하는 것이다. ‘모든 살인은 절대악이지만 어떤 살인은 인정해야’만 하는 난제다. 이를 해결할 수 없는 소년 홍길동은 의도된 무기력을 택한다.
주어진 질서를 딱 한 번 부수었던 아모개는 내내 그 질서를 능란하게 활용한다. 자신이 타파하려던 세상의 관습대로 ‘세습’을 준비한다. 아기장수의 운명을 거부하고 팔도를 떠도는 홍길동을 연민하면서 의심한다. 새로운 세대는 왜 나처럼 운명을 개척하지 않는가, 불신한다. 선을 넘어섰지만 체제에 적응했던 아모개는 자신을 몰락하게 한 왕족과 싸우겠다는 홍길동에게 “미친놈”이라고 답한다. 홍길동의 시점에서 참담한 상황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노비로 태어난 운명의 가혹함은 이미 아버지가 부수었다. 새로운 세상의 영광은 익숙해지기 전에 사라졌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게 불가피했다고, 그래도 덕분에 네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이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홍길동의 의지와 상관없던 선택이었을 뿐이다. 홍길동은 아버지의 순수(!)했던 동기가 초래한 끔찍한 사태를 해결할 과제를 받았다.
연산군도 마찬가지다. 제 어미를 죽인 아비로부터 승계되는 천부 권력은 자부심이 될 수 없는데, 아비는 그걸 무겁게 받들라 강요한다. 연산군은 이미 운명이 다 부서진 상황에서 권력을 수성해야 하는 게 끔찍해 아버지 세대를 불신하고, 조아리는 자들을 냉소한다. 이 대목에서 노비 홍길동과 왕 연산군의 처지는 계급을 뛰어넘어 실존적으로 같다. 아직 권력을 쥐어보지 못했지만, 끝내 아버지가 누린 영광을 재현하지 못할 어떤 세대의 문제다. 홍길동은 아비의 전성기를 되찾으려 하고, 연산군은 아비를 타파해 다르게 살고자 한다.
촛불이 타오르는데 찾아온 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래서 세습 권력을 민중이 타파한다는 영웅 서사도, 금수저·흙수저로 갈린 세상에 대한 그럴싸한 재연도 아니다. 에서 도드라지는 대목은 수백 년을 이어온 민중 영웅 홍길동조차 아버지의 계승자로 놓인 대목이다. 조선 역사상 최악의 광인이었던 연산군은 아버지의 자아에서 도망치지 못한 포로일 뿐이다.
촛불을 훔치려는 자들촛불 광장 4개월, 어떤 정치인들은 광장의 외침을 ‘풍문’ 정도로 취급한다. 권력을 대행하는 이는 개인의 도덕률을 사회질서로 통합해야 한다며 ‘공안’다운 목소리를 낸다. 한 무리 아버지들은 헛소리로 대통령을 보위하며 태극기로 법치주의를 모욕한다. 서로의 온기로 싹을 틔웠던 들꽃의 활력을 박제화하려는 근원을 직시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정치적 승리로 수렴하려는 이와 새로운 세상 자체를 불신하는 이는 정말 다른 아비들일까. 홍길동과 연산군이 연결된 것처럼 그들 역시 한 몸의 야누스는 아닐까.
권력자 한 명을 교체해 세상을 바꾼다는 우상을 계속 모시는 한 우리가 제아무리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광야에서 낫을 든들 세상 꼴은 바뀌지 않는다. 민심을 훔치거나 대리해 영광을 독차지하려는 아비들, 그들이야말로 ‘촛불 세대’의 역적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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