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캠핑촌, 면도날 상징물에는 ‘Black List’가 새겨 있다. 광장 몇 곳에 놓인 이 작품은 정권과 권력이 ‘검열’이란 보이지 않는 면도날로 예술과 민중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불온한 의도를 상징한다. 불법적 면도날의 난도질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광화문광장의 ‘Black List’ 작품 뒤 ‘블랙텐트’가 서 있다. 여기에 걸린 현수막은 선언한다. ‘빼앗긴 극장, 여기 다시 세우다’.
“이곳은 임시 공공극장입니다. …현재 우리의 공공극장은 공적 재원으로 운영될 뿐 연극과 극장이 동시대 국가와 사회, 인간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광장에 극장을 세우고 지워진 목소리, 추방된 이야기를 불러들이고자 합니다. 억압받는 자들, 약한 자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것입니다. …연극인 여러분, 동료 예술가 여러분 그리고 시민 여러분 광장극장 블랙텐트에 함께해주십시오.”(광장극장 블랙텐트 선언문)
일본 후쿠시마 참상 알린 천막극장 본떠지난 1월7일 세운 극장에서 시작한 블랙텐트 ‘시즌1’에 대한 호응은 뜨거웠다. 극장은 연극인, 해고노동자 등 70여 명이 힘을 합쳐 뚝딱 하루 만에 세웠다. 간결하고 견고하게 설계된 천막은 그 자체로 역사다. 텐트 설계도는 일본 후쿠시마에서 왔다. 이해성 블랙텐트 극장장은 “일본 후쿠시마의 참상을 알린 연극활동가가 만든 천막극장 설계도를 장소익 선생이 받아왔다”고 전했다. 장소익 선생은 “절대 사익을 위해서 쓰면 안 된다”며 무상으로 천막을 제공했다. 그 후쿠시마 연극인은 야쿠자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대규모 저항이 벌어지면 음악인은 콘서트를 열고, 미술가는 전시와 퍼포먼스를 해왔다. 그러나 ‘극장’이 필요한 연극인은 참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극단 고래를 운영하는 이해성 블랙텐트 극장장은 “송경동 시인이 ‘연극인들이 도와줄 만한 일이 없습니까?’ 물어서 ‘야외에서 할 만한 콘텐츠가 많지 않다’고 답했다”며 “‘야외 극장이라도 있으면 할 만한데요’ 툭 던졌더니 송 시인이 ‘천막극장을 만들자’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렇게 시작해 무대, 조명 등을 급하게 후원받아 완성했다. 일정 조율이 필요한 공연팀 섭외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연극인들의 뜨거운 호응이 이어져 ‘긴급 극장’은 문을 열었다.
블랙텐트 시즌1 공연은 1월16일 극단 고래의 ‘위안부’의 아픔을 다룬 로 시작해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으로 마감했다. 4·16세월호가족극단 의 무대에 오른 ‘세월호 엄마’들은 노동자의 현실을 풍자하며 마음껏 울고 웃었다. 시즌1은 만원사례였다. 이해성 극장장은 “객석이 70석인데 많으면 160명이 와서 일부는 서서 관람했다”고 전했다. 평일 저녁 8시에 시작하는 공연의 표를 받으려고 1시간 전부터 줄 서는 이도 많았다.
불의한 정권 퇴진은 끝나지 않았고, 시민의 호응은 뜨거워 2월6일 연희단거리패의 공연으로 ‘시즌2’가 시작됐다. 2월10일 무브먼트 당당의 , 2월14~17일 극단 돌파구의 노동조합 손해배상 가압류를 다룬 연극 , 2월21~24일 공동창작극 , 2월27일~3월2일 , 3월3일 공연이 이어진다.
“벽이 없어지는 게 가장 기쁘다”“광장은 열린 공간인데 왜 꽉 막힌 극장을 만들려 하느냐,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어요. 저는 극장 자체가 광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장도 소통의 장소이고 극장도 소통의 공간이에요. 광장을 품은 극장, 극장이 품은 광장이 만나면 굉장한 시너지 효과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해성 극장장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얇은 천막을 뚫고, 열린 틈새로 들어오는 소음과 추위는 오히려 열정을 자극했다. 이 극장장은 “이런 관람의 장애가 적극성을 끌어냈다”고 해석했다. 광화문광장의 좌우에서 스며드는 소음과 적당한 추위는 오히려 ‘열정극장’을 완성했다.
지난 2월8일 블랙텐트에서 관람한 공연 중 ‘흥그래 타령’을 듣는데 지나가는 버스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천장은 마치 추임새 같았다. 의 연희단거리패 김미숙 배우장은 “빗소리 같은 백색 소음이 오히려 집중도를 높인다”고 표현했다. 다른 극장과 관객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이해성 극장장은 “주변 환경 때문인지, 광장의 의미 때문인지, 성실하게 공연을 본달까?”라고 답했다.
열정극장은 무보수로 공연하는 배우들의 열정으로 시작된다. 김미숙 배우장은 “배우들이 작품과 광장의 의의를 전하려 애쓰고, 관객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한다”고 말했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강한 인력이 블랙텐트 안에서 쌍방향으로 작동한다. 희귀한 극장 체험이다.
블랙텐트는 광화문 캠핑촌, 한국의 마을극장이 되었다. 이해성 극장장은 “노동자 투쟁에 공감해도 직접 연극인이 해고자를 만나기는 어려웠다”며 “캠핑촌에는 해고자들의 텐트가 많은데, 연극인들이 이분들을 만나면서 벽이 없어지는 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평소 연극을 접하기 어려운 해고노동자들이 광장에서 매주 한 편씩 연극을 즐기고 있다.
2월8일 이 시작된 저녁 8시, 객석이 모자라 관객은 서로에게 더욱 밀착했다. 간이의자를 더해 관객 100여 명이 앉았다. 조선시대 장군 복장을 하고 무언가를 알리려 다니는 사람, 금속노조 조끼를 입은 노동자, 젊은 커플들이 보였다. 김미숙 배우장은 “다양한 이들이 모이니 서로를 보는 시선이 부드러워진다”고 말했다.
배제된 이들이 살아나는 진혼극장전라남도 진도 민중의 원한을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매듭을 푸는 은 진혼굿 형식이다. 연극이 끝날 무렵, 광화문광장으로 열린 문에서 돛단배 인형이 들어온다. 세월호 희생자들이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광화문광장이 아니면 그만큼 절절하지는 못했을 시의성이 살아났다. 블랙텐트는 그렇게 배제된 이들이 살아나는 진혼극장, 해방극장이 되었다. 앞선 공연들을 통해 장애인, 해고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그렇게 체험됐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경찰과 서울시가 철거를 요구하는, 불법적인 점유 공간이다. 이해성 극장장은 “불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체험”이라고 했다. 그는 “합법으로 들어가는 순간 벽이 두꺼워지겠죠”라고 덧붙였다. 송경동 시인은 “평소엔 꿈도 못 꾸죠. 경찰과 서울시가 이런 곳을 가만히 놔두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거리로 쏟아져나온 주권자들의 직접민주주의 행동이 가능하게 한 공간”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은 광화문광장을 도는 길놀이로 이어졌다. 길놀이의 뒷자락, 금속노조 조끼가 보였다. 인근에서 농성하는 한화테크윈 해고노동자들이었다.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해고자 3명은 “어제 광화문광장을 둘러보고 오늘 공연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승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20조원짜리 삼성테크윈을 2조원에 한화로 넘겼다”며 “이것에 반대하다 해고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연극에 나온 사연이 우리 일 같았다”며 “이런 기회가 아니면 연극을 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위로를 건네는 공공성은 불법의 블랙텐트에서 실현되고 있다.
보는 관객에서 공연하는 사람으로 진화하는 이들도 있다. 을 보고 나온 전지혜씨는 ‘시즌1’에 이어 이날도 공연을 보러 왔다. 이렇게 블랙텐트 공연을 반복해서 보러 오는 이가 적잖았다. 친구와 함께 공연을 본 전씨는 “우리는 전문적이진 않지만 춤으로 몸을 훈련하는 사람들”이라며 “3월1일 블랙텐트에서 다른 춤패와 같이 공연한다”고 말했다. 블랙텐트는 연극 공연이 비는 시간에 공간을 개방하고 있다.
궁핍현대미술광장에선 희망과 격려의 전시블랙텐트 옆에는 ‘궁핍현대미술광장’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훼손된 공공성을 오늘 광화문광장에서 되살리자는 취지다. 광화문미술행동이 운영하는 여기서 지금 ‘광장목판화전’이 열리고 있다. “새해를 송축하고 그해의 재앙을 막기 위해 그린 그림”인 세화(歲畵)를 전시한다. “그동안 광화문광장에서 진실을 인양하려 애쓴 모든 시민과 함께하는 희망과 격려의 전시”다.
이렇게 겨우내 텐트에서 버텨낸 예술인들의 노력으로 광화문광장은 문화촌이 되었다. 그곳에 가면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지금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복잡한 해방감’이 기다린다. 참, 무료 공연에 후원으로 운영되는 블랙텐트는 ‘흑자극장’이 되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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