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겨울, 거리는 한산했다. 주인공 ‘대발이’(최민수)를 앞세워 역대 2위 시청률 64.9%를 찍은 드라마 (MBC)가 방송되던 시간, 거리는 늘 그랬다. 내가 살던 서울 사당동 어느 골목길에 2층짜리 중국요릿집이 있었다. 주인 딸이 예뻤다.
대발이가 아내 지은(하희라)에게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라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날쯤이었던 것 같다. 전화를 했다. 중국집 딸과 나는 신인 가수들이 여럿 나오는 기업 이벤트성 콘서트에 가기로 했다. 그녀가 굳이 나를 따라나선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처음 만난 가수가 이승환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승환과 ‘여고생 나라의 꿈’</font></font>당시 27살이던 이승환은 으로 1집 앨범을 10만 장 넘게 팔았다. 단숨에 인기 가수 자리에 올랐다. 길보드 차트(그 시절 길거리 ‘불법 복제 노래 테이프’ 판매상들의 선호 가요)도 휩쓸었다. 요즘에야 ‘라이브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가수가 많지만, 이 수식어의 첫 주인공 격인 가수가 이승환이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최고의 가수로 살아왔다.
여전히 ‘어린 왕자’ 같은 얼굴이지만 올해 52살이 됐다. 최근 촛불집회 문화공연에 나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동생”이라고 불러 촛불 시민들을 놀랜 적이 있다(이승환은 1965년생, 표 의원은 1966년생이다).
내 기준에서 그는 꽤 멋지게 나이 드는 것 같다. 최근엔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 자신이 운영하는 음반기획사 드림팩토리 사옥에 ‘박근혜는 하야하라, 가자 민주주의로’라고 쓴 대형 검은 펼침막을 걸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상처 입은 이들을 어루만지는 노래 를 가수 전인권, 이효리와 함께 제작해 무료 배포했다. “불의 앞에선 중립을 지킬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는 인터뷰가 화제를 모았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명절을 앞두고 감성적이 된 탓일까? 문득 이승환의 옛 노래 이 떠올라 그의 페이스북을 찾았다가, 한상일 감독의 5분8초짜리 단편영화 을 만났다. 같이 보고 싶어서 글로나마 소개한다.
대학 신입생 ‘나라’는 화장부터 시작했다. 전공책을 팔에 끼고 우아하게 캠퍼스도 걸어보고, 새우깡 안주에 낮술 마시다가 죄 없는 가로수를 부여잡고 ‘오바이트’도 한다. 교수님과 지성 넘치는 대화를 상상하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부딪친 남자와 ‘꽁냥꽁냥’ 사랑에 빠진다. 가끔 티격태격할 때도 있다. 영화가 절반에 이른 시점에 나라는 드디어 가로등 밑에서 첫 키스를 한다. 아련한 향기 같은 장면에서 화면은 조금씩 옅어지다가, 까매진다. 대학생 상상하기는 여기까지다. 암전. 나라가 친구 미래에게 말한다.
“아, 빨리 대학 가고 싶다.” “그러게.”
남은 2분30여 초 러닝타임은 완전한 암흑이다. 다시 여고생 나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근데, 미래야. 우리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질 나쁜 스피커에서 투박하고 불친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아, 아, 손님 여러분. 지금 위치를 벗어나지 말고 잠시만 대기해주세요.”
미래가 말한다.
“몰라, 아무튼 대기하라잖아.”
나라는 그래도 걱정이 된다.
“밖에 배도 있고 헬기도 있는 것 같은데.”
10초간의 정적, 그리고…. 암흑이 된 화면 밖으로 수많은 절규가 터져나온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여기 사람 있어요” 암흑 속 절규</font></font>“아저씨, 여기 사람 있어요.” “여기 사람 있다니까요” “여기 사람 있어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목소리는 쌓이고 쌓이다가 끝내 속절없이 가라앉는다.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하얀 활자들이 떠오른다. “이 나라의 어른이라면 지금 소름 끼치도록 불편해야 합니다.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려면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돌아와 가족과 만나야 하는 시간이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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