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 정치는 명실상부한 다당 체제를 갖췄다. 2016년 4월 총선으로 야당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갈라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면서 그토록 공고하던 보수 정당이 바른정당과 새누리당으로 분리됐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양극화된 양당 체제’로 봤다는 점을 놓고 보면 이는 매우 의미 있는 변화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은 당 이름이 아닌 그저 ‘여당’과 ‘야당’으로 불렸고 두 거대 정당은 정책 경쟁이 아닌 ‘반민주’ 대 ‘민주’ 구도로 아귀다툼을 벌여왔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16년 12월 정치발전소 특강에서 한국이 다당 체제로 들어선 것을 이렇게 평가했다. “촛불시위는 한국 정당 체제를 양극화해온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해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인 전환이라고 할 만큼 크다. (…) 좌우 간, 또는 진보·보수 간 거리는 무척 가까워졌고, 나아가 대연정까지도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기초를 만들었다. (…) 민주 대 반민주 갈등축의 소멸은 한국의 정당 체제가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양극화됨으로써 야기됐던 실체적, 사회경제적 문제와 대북정책을 둘러싼 사안들에 대해 타협과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제 한국은 싸움의 정치에서 타협의 정치로 가는 길목에 섰다. 그것은 물론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이 펴낸 [정당의 발견](후마니타스 펴냄, 2015)은 첫 번째 장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중심은 서로 다른 가치와 시민 집단의 요구를 조직하고 대변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공공정책의 결정권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정당 중심의 다원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한, 현대 민주주의는 그 가치대로 실천되기 어렵다.”
다당 체제라는 하드웨어가 갖춰졌다면 그에 걸맞은 소프트웨어도 갖춰야 한다.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태도의 변화를 겪어야 할 시점이다. [정당의 발견]은 ‘차이와 이견을 이해하고 다루는 민주적 태도’에 대해서 말한다. “민주적 토론이라는 가치에 맞게 의견을 형성하는 방법은 옳고 그름의 전선을 만들지 않는 데 있다. 옳고 그름을 두고 다투는 것은 상대를 제압하고 배제하려는 열정을 만든다. 그러면 이견과 공존하기 어렵다. 반면 민주적 토론은 좀더 나은 것을 모색하고 좀더 바람직한 것을 추구한다. 그래야 평화롭게 싸우고,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차이가 남는다면 조정과 타협을 모색할 수 있다.”
타협의 대상이 되는 ‘갈등’은 민주주의를 논하는 데 매우 중요한 화두다.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을 ‘어떻게든 없애야 하는 암덩어리’로만 취급해선 안 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갈등을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보았다.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유규오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16)에 나오는 애덤 쉐보르스키 미국 뉴욕대학 교수의 인터뷰를 보면 갈등이 왜 민주주의의 엔진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득 재분배에 관한 경제적 갈등, 종교적 갈등, 인종 갈등, 지역 갈등 같은 것들은 커다란 갈등입니다. 정당들은 경쟁 구도를 만들고 갈등을 조직합니다. 각 정당이 대중의 각기 다른 요구 사항을 대변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 갈등은 사람들의 투표를 통해 해결됩니다. 민주주의는 오직 정당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갈등이 있어야 다양한 정당이 생기며, 이 정당들이 조정과 타협을 통해 갈등을 줄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정당 체제는 점점 민주화되는데 아쉽게도 정치인들은 제자리걸음이다. 특히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변화된 정당 체제를 민주적으로 견인할 만한 정치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유권자를 우울하게 만든다. [보좌의 정치학](이진수 지음, 호두나무 펴냄, 2015)은 국회 보좌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실무적으로 써놓은 책이지만 읽다보면 한국 정치인들의 민낯을 발견하게 된다. 1994년부터 보좌진 생활을 시작해 20년 넘게 수많은 정치인을 곁에서 지켜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가치를 걸고 불확실성을 향해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대로, 계파 혹은 특정 리더십에 기대어 선수를 쌓다보면 찾아올 지위 상승을 기다린다. 정치적 사활을 걸고 법안을 통과시키려 애쓰지도, 국민적 의혹을 풀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려고도, 시대정신에 입각한 정치적 과제를 제시하고 집단적 힘을 모으기 위해 앞장서지도 않는다. 정치의 본질인 권력, 그리고 권력의 본질인 투쟁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한 ‘열정, 책임감, 균형적 판단을 갖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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