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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미국에만 있지 않다

기득권 체제에 대한 불만이 낳은 괴물을 분석한 <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 <또라이 트럼프>
등록 2016-10-19 17:23 수정 2020-05-03 04:28

힐러리 로댐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2016년 미국 대선이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전대미문의 여성 대통령이란 주인공 승자가 등장해도 신스틸러(scene stealer)는 단연 버니 샌더스였으면 좋겠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도널드 트럼프다. 힐러리 클린턴은 또 한 명의 그저 그런 캐릭터로 대통령직을 시작할 것이다. 한편, 이전에 샌더스에 대한 뉴스 북리뷰를 쓰면서 차마 못한 한마디는, ‘어쩌면 샌더스와 트럼프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심증이었다.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낀 이들의 도전이란 면에선 근본을 공유하는 현상처럼 보였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론인으로서 비겁한 정도를 지켰다.

아니 저토록 많은 이들이 그토록 지지하는 이유가 있겠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된 트럼프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뭔가 꺼림칙한 것이 남는다. 장애인을 흉내 내며 비하하고, 여성을 농락하고, 멕시코와 국경에 장벽을 치겠단 헛소리를 하는,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도 ‘말이 안 되는’ 트럼프를 미국인의 절반이 지지하는 이유가 뭘까? 기사만 봐서는 이해가 어렵다. 정치의 해석은 유권자, 인간의 선택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니, 트럼프 지지자들이 바보는 아닐 텐테, 당신처럼 말이다.

궁금증에 응답할 두 권의 책이 있다. 미국에서 나와 번역된 (애런 제임스 지음, 홍지수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2016), 강준만 교수가 쓴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6)이다.

‘철면피학’을 개척한 애런 제임스 캘리포니아대학(어바인) 철학과 교수는 에서 “철면피는 대인 관계에서 철저히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처신하면서 스스로에게 그럴 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다른 사람이 불만을 표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주로 남성)”이라고 정의한다. ‘철면피’ 트럼프에 대한 정의지만, 갑자기 ‘그런데 최순실은?’이라는 해시태그를 유행시킨 그분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남성’이라는 괄호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낯설고 이상한 캐릭터에는 반드시 무언가 있듯이, 트럼프를 해석하면 세계가 보인다. 이명박근혜 시대의 이해에도 큰 도움을 준다.

강준만 교수의 두꺼운 책을 필자의 방식대로 이해하면 트럼프는 “악마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등장한 악마의 변호인”이다. 악마는 “말로는 ‘차별 반대’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차별’을 일상화한 체제”다. 여기에 1980년대부터 등장한 미국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의 과잉이 있다.

“양당제 민주주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펩시콜라와 코카콜라의 차이와 다를 게 없다며 코웃음 치는 미국인이 많다. 진짜 문제는 ‘엘리트 대 비(非)엘리트’의 구도인데, 정치라는 건 출세한 엘리트들 간의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어서 책은 “트럼프는 아주 고약한 방법으로 그 비밀을 까발리고 나섰고” “트럼프가 정치를 죽인 게 아니”며, “‘정치의 죽음’이라는 잿더미에서 태어난 피닉스, 즉 불사조와 같다”는 것이다.

에서는 이것을 ‘철면피 관리 전략’이라고 부른다. 먼저 책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며 결코 멍청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트럼프의 말이 (일부) 허풍이며 그의 철면피적 성격을 모르지 않는단 것이다. “어쩌면 트럼프를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단순히 정치계의 철면피 관리 전략 차원에서, 부패한 정치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선호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다시 위대한 나라’(Make America Great Again·트럼프 선거 구호)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염증과 향수가 겹치면 독재가 나온다. 지금 지구촌은 ‘강한 남자들’의 시대다. 냉전시대 양강의 위치를 그리워하는 러시아의 푸틴,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추억하는 터키의 에르도안, ‘일본 다음의 아시아 선진국’ 시절을 잊지 못하는 필리핀의 두테르테 등이 트럼프와 겹친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이 지지를 얻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 현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에 태어나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강준만은 트럼프가 SNS를 통해 대중과 직거래하는 면에 주목한다. 모바일 SNS가 압도하는 ‘미디어 혁명’에 기반해 “트럼프는 ‘나는 유권자들의 소유다. 나는 천사가 아니지만 그들에 의해 올바른 일을 할 것이다’라며 모바일 대중에게 자신을 이용할 것을 권한다”는 것이다. 이어 “트위터에 700만, 인스타그램에 100만 명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트럼프는 온라인에 자신만의 뉴스룸을 구축했다”고 분석한다.

는 그럼에도 ‘트럼프의 역설’이 있다고 한다. “그는 공화국에 경종을 울렸다. 트럼프로 인해 국민들은 지금까지 숨겨져온 것들과 맞닥뜨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점잖게 가렸던 인종주의, 은밀한 차별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미국의 토대가 된 포용 원칙을 재천명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을 때 유효한 반성이다. 의 마지막 소제는 ‘한국은 트럼프 현상에서 자유로운가?’이다. “기득권 체제에 대한 집단적 좌절… 이 점에서 트럼프 현상은 바다 건너 먼 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에 있지만, 트럼프 현상은 어디에나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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