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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의 추억

등록 2016-12-24 12:46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저.도.의.추.어…(ㄱ)’. 나뭇가지로 경남 거제시 저도의 바닷가 모래 위에 곱게 써내려간 글자.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은 첫 여름휴가지로 저도를 선택했다. 1970년대 추억을 소환할 무대였다. 아버지 박정희가 딸 박근혜를 데리고 여름휴가를 즐겼던 저도에서 박근혜가 써내려간 ‘추억’이란 글씨는 박정희 신화를 불러내는 주술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절박한 순간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올림머리’가 어머니 육영수의 재현인 것처럼(‘저도의 추억’ 사진에서도 해변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올림머리!). ‘저도의 추억’이라는 파일 이름이 붙은 이 사진은 2016년 겨울 최순실 태블릿PC에서 발견돼 새삼 추억 ‘돋게’ 했다.

박근혜-김기춘 vs 노무현-문재인

지난 12월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되자, 또 다른 추억의 사진이 등장했다.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 직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운명은 얄궂다. 불과 12년 만에 자신이 똑같은 이유로 “피눈물 흘리게” 될 줄이야.

하긴 누가 알았을까. 2004년 당시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위원을 맡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김기춘 의원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한 사건은 우리 생애에 다시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12년 만에 그는 전직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생애 두 번째 탄핵을 경험했다. 한 번은 대통령을 끌어내릴 공격수로, 한 번은 (변호인단은 아니지만) 대통령을 방어하는 수비수로 위치를 바꿔가면서 말이다. 김기춘은 2004년 첫 대통령 탄핵심판사건 공개변론이 열리던 날,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운동을 이유로 다음 공개변론을 미뤄달라고 요구했다. 2016년 겨울 “최순실을 모른다”고 말할 때처럼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2004년 김기춘에 맞서 노 전 대통령 변호인단을 이끈 사람은 문재인 변호사였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여행 도중 탄핵 소식을 들은 그는 급귀국해 헌법재판관에서 퇴임한 지 얼마 안 된 하경철 변호사 등을 법률 대리인단으로 불러모았다. 변호인으로서 기자들을 모아 첫 인터뷰를 한 사람도 문재인이었다. 2004년 수비수였던 그가 2016년에는 대통령 후보 지지율 1위의 최전방 공격수로서 생애 두 번째 탄핵을 경험하고 있다.

2016년 겨울, 나는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을 생애 두 번째로 취재하게 됐다. ‘저도의 추억’처럼 거창할 건 없지만,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탄핵의 추억’을 12년 만에 소환했다. 기억력이 나쁜 탓에, 뽀얗게 먼지 쌓인 당시 취재수첩에 의존했다. 2004년 봄, 수습기자 딱지도 떼지 못한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헌법재판소를 보초처럼 지키고 서 있다가, 윤영철 헌법재판소장과 헌법재판관들을 귀찮게 따라다니며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변론에 출석 안 하면 이후 절차는 어떻게 되냐” 등등을 묻곤 했다. “조기구이와 수삼튀김. 후식은 멜론 여덟 접시와 오렌지 한 접시. ○○○ 재판관이 멜론 못 먹음.” 수첩에는 별별 취재 메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이 낯설고 혼란스럽기는 헌법재판관들이나, 기자들이나 매한가지였다.

지금 다시, 헌법재판소

2004년 헌법재판소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렸다. 대통령 탄핵심판, 대통령 선거중립의무 헌법소원, 신행정수도 헌법소원 등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건의 결론은 헌재에서 판가름 났다. ‘정치의 사법화’가 ‘사법의 정치화’로 이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한적하던 헌법재판소는 기자들로 내내 북적였고, 법원 기자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기자는 더 깊고 오래도록 취재해 책()까지 써냈다.

지금 다시, 헌법재판소에 눈과 귀가 쏠린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헌법 질서의 수호자’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설립됐다. 헌법재판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지금 다시, 30년 만에 소환해야 할 추억이고 물음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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