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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

등록 2016-09-30 20:11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기자일의 첫 번째 장점이라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아니, 내가 뭐라고, 그들이 나에게 말한다. 흉금에 담아두었으나 차마 꺼내지 못했던 얘기를 앞에서 말한다. 부모라서 하지 못한 이야기, 친구들에게 들려주기 어려운 이야기,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이야기를 생면부지 기자 앞에서 쏟아낸다. 자기 이야기가 잘 알려져서 자신의 억울함이 조금은 풀리길 바라는 간절한 목소리 앞에서 가끔은 울컥한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기사든 논문이든, 어쨌든 글의 본질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면, 이토록 소중한 기회를 얻는 것이 기자일의 유일한 장점이다. 구하기 어려운 ‘사람책’을 읽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월급 받으면서 한다! 매주 마감에 쫓겨 허겁지겁 이대수(이번주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로 살다가 가끔은 감사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물정 배우고 보이지 않은 세계를 엿보며 살았다.

토끼몰이식 일상에서 우리는

기자(記者)는 ‘기록하는 자’, 사연과 사건을 실어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다. 사람은 들었던 얘기 또 들으면 지겹다. 뉴스가 되려면 새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언가를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할 기회가 남아 있었던 시절. ‘나는 왜 이성애를 하지 못하나? 나는 왜 군대를 가지 못하나? 나는 왜 고기를 먹지 못하나? 나는 왜 투표를 하지 못하나? 나는 왜 결혼을 하지 못하나?’ 성소수자, 병역거부자, 채식인, 청소년, 비혼의 목소리는 새로웠다. 그들의 ‘나는 왜’는 절절한 고백이자 인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전하는 순간조차 ‘정말로 되겠어?’ 회의했지만, 기대가 크지 않았던 자조차 너무 오랜 기다림에 지쳐갔다. 오지 않은 미래는 없다는 확신만 세졌다. 실질적 상원의 지위를 누리면서 헌법의 가치는 외면한, 인권의 장벽이 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는 날은 인권의 제삿날 같았다.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성소수자 권리, 18살 투표권 등 보편적 권리가 통곡의 벽에 막혔다.

미래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위기의식이 커졌다. 일신의 안위조차 위협받는 이들에게 타인을 돌볼 틈은 당연히 없다. 사방을 방패로 막아놓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시위대를 검거한 예전의 토끼몰이식 진압처럼, 도처에 위기와 위험이 깔린 토끼몰이식 일상으로 우리는 내몰렸다. 지독히 나쁜 세상을 만든 지독히 나쁜 정부가 거꾸로 세계의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사회의 변화가 없으니 권력의 향배만 중요해졌다. 그리하여 생긴 ‘시추에이션’. 최선 따위는 없다, 차악과 최악 중 하나만 골라라. 최선을 말하는 자는 방해꾼!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압살한 것은 자유주의 야당이 아니라 막 터져나오기 시작한 새 목소리였다. 그들의 의제는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고, 결국엔 들리지 않게 됐다. ‘헬조선’을 떠나도 ‘헬지구’가 기다린다. 신권위주의와 구지배세력, 제국주의와 테러리즘, 힐러리와 트럼프, 차악과 최악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됐다. 체 게바라의 미래는 티셔츠에 갇혔다.

차악과 최악 중 하나만 골라라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네트워크. 모르는 이들과 더 이어졌지만,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은 사라져갔다. ‘내가 혹시 모르는 게 아닐까?’ 마우스만 잡으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회의는 사라졌다. 어쩌면 모를지도 모르는 고통의 세계에 대한 조심, 그 감각이 옅어졌다.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반응이 그러하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면, 비명을 지르는 이유가 있을 텐데….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 사라진 자리에 몰라도 되는 세계라 주장하는 목소리만 높아진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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