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게 싫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던가, 체육시간을 땡땡이치고 교실에서 자고 있는데 체육 선생님이 불시에 들이닥쳐 목덜미를 잡았다. “다섯 대 맞을래, 운동장 다섯 바퀴 뛸래?” 답은 정해져 있고 대답만 하면 되던 그 질문에 “다섯 대 맞을게요” 했다. 맞는 건 익숙했지만 아무 재미도 없이 숨만 턱까지 차오르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섯 대를 맞고 운동장 다섯 바퀴를 뛰었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여하튼 그만큼 뛰는 게 싫었다.
그러다 달리기를 시작한 때는 재수생 시절이다. 어쩔 수 없었다. 새벽마다 경기도 남양주의 한강변을 달리는 건 규율이었고, 그 규율의 의도는 간명했다. 가혹한 시간을 계속 각인시키는 각성의 반복. 그때 늘 생각했다. 이렇게 달려 나가서 ‘여기보다 어딘가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어딘가가 대학인지, 아니면 매일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합숙학원에서의 탈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강 건너면 있을 남쪽의 불빛인지는 늘 헛갈렸다. 암튼 그렇게 달려 벗어나고 싶었다. 이렇게 계속 달려 어딘가에 닿을 수만 있다면 오늘 밤도 재밌고 내일 밤은 더 다이내믹할 시공간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또 같은 자리였다.
그때, 매일 뛰던 길이 3km였는지 그보다 짧았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달리기를 6개월 더 하고 나서야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은 달리지 않으면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어디라도 갈 수 있게 됐지만 오늘보다 더 다이내믹한 내일은 자주 오지 않았다.
“김 기자, 그럼 내일 같이 뛰어보실래요?” 이번에도 시작은 그 한마디였다. 분명 권유였는데 묘하게 ‘자극’으로 수신됐다. 지난 7월 제주 합본호 취재 때 만난 안병식 제주울트라트레일러닝대회 디렉터는 내가 ‘크로스핏’을 하고 있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며, 평소 운동을 하고 있으니 내일 아침에 바로 뛰자고 했다. 알았다고는 했으나 마침 그때 운동화가 없었다.
운동화 없이는 운동장에 나서지 않는 것이 ‘선수’의 도리라고 물러섰지만 그때부터 계속 ‘18km’를 생각했다. 나는 과연 산길 18km를 뛸 수 있는 사람인가, 그 거리를 부질없이 측정해보며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생각해봤다. 그 산길에서 내 허벅지는 얼마나 견뎌낼 것인가, 심장과 허파를 관통하는 호흡에 나는 얼마나 찢겨나갈 것인가. 무엇도 도전해오지 않았는데 이미 마음은 응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김 기자, 같이 뛰어보실래요?”</font></font>“자, 여기서 출발합니다.” 지난 8월28일 오후 2시, 안병식 디렉터의 짧은 선언으로 달리기가 시작됐다.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갑마장길 입구가 출발점이었다. 18km는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지만 의외로 코스 구성은 단순해 보였다.
한자풀이로 ‘시간을 더한다’는 의미의 가시리는 13개의 크고 작은 오름에 감싸여 있고 그 오름 사이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완만한 초지가 펼쳐진 지형이다. 그 오름과 초지 사이를 오가며 말을 먹이던 목동을 제주어로 ‘말테우리’라고 불렀는데, 갑마장길은 말테우리들이 말을 몰던 길이다. 갑마장길은 말들의 경로를 구획하고 이탈을 방지하는 끝없는 잣성(돌을 쌓아올린 담)으로 이어지는데 그 끝에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이 있다. 가시리 18km 코스는 곶자왈길을 달려 따라비오름∼잣성길∼큰사슴이오름을 왕복하는 코스다.
초반 2km 정도 곶자왈길은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얕은 길과 높은 나무가 어우러져 뿜어내는 길의 냄새에 빨려 들어가듯 몸이 내달려진다. 꾸역꾸역 살아서 이런 길을 홀로 달릴 수 있고, 이미 달리고 있다 생각하니 사는 게 온통 행복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리는 압력마저 대단하게 느껴졌는데, 내가 다릴 뻗고 내디뎌 발휘하는 힘으로 지구를 통째 누르고 있단 기분이 들 정도로 신비하고 몽롱했다.
거기까지였다. 눈이 속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오르막을 뛰어 올라봐야 알 수 있다. 완만해 보이던 따라비오름의 경사는 그걸 발로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순간이 되자 무지막지한 벽으로 덮쳐왔다. 출발에 앞서 18km는 짧은 코스가 아니니 페이스를 조절하고, 초반 과속하지 않고 체력 분산에 신경 써야 한다는 주의를 들었지만 당최 이 오르막길 앞에 그 말이 무슨 부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뛰어야 한단 생각에 모든 것이 사로잡힐수록 다리는 무거워졌고, 무거워진 다리를 굴러 속도를 내는 일은 한발 한발이 한계를 딛는 행위였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초반 2㎞까지는 황홀경 </font></font>그 언덕을 400m쯤 올랐을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가시리 일대의 풍광은 격렬하게 땅을 딛고 올라온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비오름은 3개의 능선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능선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포개지듯 이어져 가운데 작은 분화구를 숨겨두고 있다. 그 바깥으로 제주에 이런 지형이 있었던가 싶은 탁 트인 평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수백만 평에 달하는 정석비행장과 제동목장이다. 그 뒤로 한라산은 구름에 잡혀 있고, 해안선은 끝도 없이 세상을 분할한다. 누구도 땅 위의 모든 길을 가볼 순 없겠지만 단언컨대 이 길은 필히 가볼 가치가 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뭐랄까 이 풍경을 보지 못한 사람에 비해 확실히 세상사 덜 손해를 봤단 생각이 들었다.
오르는 건 힘들다면 내려가는 건 예민한 일이다. 가파름을 온전히 속도로 받아들이다가는 사고가 난다. 달려나갈 수 있는 힘과 제어할 수 있는 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데 그 역할은 오직 무릎과 발목의 몫이다. 이미 기진해진 상태에서 무리하지 않되 속도감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실력이다. 처음 산길을 달린 초보에게 그런 실력이 있을 리 없고 그저 오를 때에 비하면 찰나처럼 느껴지는 내리막길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고는 잣성길을 만난다. 문자 그대로 달릴 수 있는 길이다. 코스 전체에서 가장 아찔하면서 나른한 달리기였다. 하나의 오름을 넘어오며 18km를 달릴 수 있을 것이냐는 두려움에서 풀려났고, 그 오름을 넘음으로써 이미 생의 도전에 한 고개를 넘어왔다는 만족감까지 더해졌다. 그 마음을 추진력으로 큰사슴이오름을 또 달렸다. 큰사슴이오름을 오르는 길은 폭신한 섬유질로 짜인 그물망으로 덮여 있어 훨씬 편안했다. 오락가락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 체력인지 힘들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3시간17분, 무엇이 남았는가 </font></font>그렇게 큰사슴이오름을 돌아 내려와 유채꽃프라자까지 오면 18km 구간의 절반이 끝난다. 9km 지점이다. 이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돌아가는 길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길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어찌됐든 시작했던 자리로 넘어가야 끝낼 수 있단 생각뿐이었다. 코스 변경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17.8km를 뛰었다. 걸린 시간은 3시간17분.
그 달리기가 끝나고 그래서 무엇이 남았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긴 어렵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고 했던가. 어쩌면 달리기는 말로 설명되는 게 아닐지 모른다. 무엇보다 괴로운 걸음을 재게 옮겨 그 산길 정상에서 만났던 무참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설명할 말도 찾지 못하겠다. 다만, 한 가지 꼭 권하고 싶다. ‘하늘과 호수, 들판을 달려 파도가 흰구름을 품는 곳으로’ 달려보시라. 여기보다 그렇게 어딘가로. 2kg쯤 몸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것은 아주 사소한 덤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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