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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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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평화

등록 2016-07-21 15:33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지난 7월6일 출시된 닌텐도의 실시간 증강현실 게임 의 플레이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떨리는 파트는 같은 포켓몬을 찾은 사람들이 우연히 현실의 어느 장소에 함께 서 있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미소지으며 눈빛을 교환한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게임의 가장 밝은 미래였다. 각자의 방구석에서 가상현실에 접속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던 우리는 언젠가 정말로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고(그러니까 ‘현피’ 같은 게 아니라), 그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도 않은 채, 우리가 공유하던 바로 그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 이어 쏟아진 뉴스에선 그런 장면이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가상을 통해 현실로

포켓몬 마니아들은 비로소 실제의 야생에서 포켓몬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에 열광했다. 숨어 있던 다른 포켓몬 마니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했다. 이들뿐 아니다. 평소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관심 없던 이들도 게임을 화면 바깥 현실로 끌고 나온 새로운 게임에 뛰어들었고, 는 이들을 아무도 생각지 못한 곳으로 데려갔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선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다양한 연령과 인종의 낯모르는 타인들과 나눈 마법 같은 순간에 대한 경험담이 쏟아졌다. 그건 게임의 밝은 미래가 아니라 진짜 현실의 밝은 미래처럼 보였다. 인종 갈등이 팽팽한 지금, 새벽 3시 미국의 어느 거리에서 40대 백인 남자 하나와 20대 흑인 남자 두 명이 경찰을 만나 아무런 의심도 적대감도 없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는 이야기. 10년 동안 집에서만 지내던 ‘히키코모리’가 때문에 집 밖으로 나와 자유를 경험했다는 말. 하나의 ‘포케스톱’(아이템 획득 장소)에 온갖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고라파덕’이나 ‘꼬부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광경, 그것에 대해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연대의 열망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가상현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현실의 장소들을 더 잘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 이 게임은 시속 30km 미만으로 일정 거리(2~5km)를 이동해야만 포켓몬 알을 부화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야 플레이가 가능하다. 사람들은 포켓몬을 잡기 위해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전에는 거기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걸 발견했다고들 했다. 어떤 이들은 ‘레어템’(희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키’는 다름 아닌 ‘자신이 사는’ 동네를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 게임에는 단점이 많다. 기술적 결함도 많고 아직 너무 단순해 게임 자체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다. 알려져 있듯 안전성 문제를 비롯해 개인정보 활용, 개인 공간의 프라이버시 침해 등 부작용도 많다. 곧 열풍은 사그라들 것이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가 안 되는 나라에 버려졌다.) 그러나 적어도 가 만들어낸 현상은 예상치 못한 ‘좋은 미래’의 한 장면을 암시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각자의 방에 처박혀 있던 이들이, 길 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함께 원하는 이들과 느슨한 연대를 맺는 것. 각자의 동네를 걷고,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타인을 만나고, 그 사람의 계급·인종·성별·연령에 관계없이 공유하는 것에 대해 작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삶. 그것은 내가 상상하는 작은 유토피아에 가까웠다.

잊지 말아야 할 ‘좋은 미래’

세계가 점점 분열해 극단의 배타주의와 폭력으로 치닫는 지금, 증강현실 유의 기술이 지배하는 어느 미래에 세계가 전면적인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지게 된다면. 누군가는 이때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면 그 기술을 이용해 연대할 수도 있었어.’

이로사 현대도시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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