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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소피 마르소 표정 따라 짓던 엄마… 시간을 선물한다면 다시 볼 수 있을까
등록 2016-06-24 08:18 수정 2020-05-02 19:28
이슬아

이슬아

이십 몇 년 전 엄마의 화장대 거울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모서리에 스카치테이프를 무척 조심스러운 모양으로 붙인 걸 보면 엄마는 그 사진을 아끼는 것 같았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화장대보다 키가 작았으며 사진 속 여자를 알지 못했다. 엄마는 닮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자주 바라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점점 닮게 된다고 말했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닦고 동생과 나를 씻기고 재우다가 안방에 들어와 잠깐 거울 앞에 설 때면 엄마는 사진과 자기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진 속 여자의 표정을 지어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다 아는 것 같기도 한 그 표정. 당신 없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신 없인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바로 그 표정.

어린 나는 안방에 깔린 이불에 누워 엄마가 그러고 있는 뒷모습을 매일 보았다. 옆에선 한 살 어린 남동생이 레고 블록을 조립했는데 그는 엄마가 거울 보는 모습엔 관심이 없었다. 아주 찰나였지만 엄마가 사진 속 여자와 조금 닮아 보이던 순간도 있었다. 그녀가 소피 마르소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몇 년 뒤의 일이다. 소피 마르소가 지었던 표정을 따라해보던 엄마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엄마의 허리는 24인치였고 티셔츠와 하이웨스트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내가 아는 어른들은 모두 엄마를 미인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아빠를 쏙 닮은 이목구비였고 여배우의 표정 같은 건 따라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울 때면 나는 곧바로 엄마와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엄마가 닭갈빗집에서 하루 종일 서빙일을 하고 돌아온 10년 전 어느 날 밤에도 그랬다. 부엌 식탁에 앉아 빨간 코를 하고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내 목젖이 시큰거렸다. 이유도 모르는 채 따라 울면서 엄마 몸을 보았다. 엄마는 예전보다 덜 날씬했다. 통통해도 예뻤지만 고단해서 찌게 된 살 같아서 나는 서글펐다.

남동생은 그런 모녀 옆을 심드렁하게 지나쳤다. 그 무렵 그는 열네 살이었고 자기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날에도 위로 한마디 안 건네는 그가 미웠다. 열다섯 살의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아름다운 엄마를 위로했다. 집을 채우는 건 여자들의 목소리뿐이었다. 엄마가 눈물을 추스른 뒤 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쯤 동생이 방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목욕물 받아놨어.”

그리고 그는 다시 방에 들어갔다. 우리 집엔 욕조가 없었다. 그래서 김장할 때 쓰던 고동색 대야에 물을 받은 뒤 몸을 담그곤 했던 것이다. 내가 조잘조잘 떠드는 동안 창고에서 대야를 꺼내와 따뜻한 물로 채웠을 동생이 있었고, 엄마를 아끼는 건 나뿐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날 엄마는 오래 목욕을 했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쉰 살이 된 봄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몸살을 앓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엄마가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걸 알아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전화를 끊고 동생에게 전화해 속상하다고 말하며 훌쩍였다. 동생은 뭐 그런 일로 질질 짜냐는 식으로 심드렁해하며 말했다. “돈 많이 벌자. 그럼 많은 게 괜찮아져.”

나는 너무 단순한 대답을 하는 동생이 미웠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돈을 많이 벌면 엄마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지 생각했다. 가장 주고 싶은 것은 시간이었다. 쉴 시간이 조금 더 생긴다면 엄마는 산책을 자주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천천히 늙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가 소피 마르소 사진을 자주 바라보던 때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때 엄마는 최대한의 자신을 꿈꿀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될 수 있었던 어떤 자신, 그 무수한 가능성들이 다 아까워서 서글펐다. 엄마를 나이 들게 한 시간이 미웠다. 이 사랑에 비하면 내가 남자친구에게 들이는 사랑은 아주 조그만 것 같았다.

이슬아 손바닥문학상 수상자·레진코믹스 만화 ‘숏컷’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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