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속이는 일에 아주 탁월했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미스터 오렌지가 그랬다. 타란티노의 데뷔작 에서 미스터 오렌지를 연기한 팀 로스 말이다. 그는 마약을 팔아본 적도 없으면서 마약을 팔다가 경찰에게 잡힐 뻔한 썰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외우고 또 외운다. 거짓말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상상하면서 모든 세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다보면 자기조차 속아 넘어가버리는 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애인과 나는 종종 그런 걸 했다. 마음속으로 각자 한 명씩 어떤 영화나 만화 속의 한 역할을 떠올리는 것이다. 어떤 배역이어도 상관없다.
둘 다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애가 내게 묻는다. “정했어?” 내가 “응” 하고 대답하면 게임이 시작된다. 시작되는 순간부터 걔랑 나는 평소의 자기를 버리고 마음속으로 정한 배역이 되기로 애쓴다. 무슨 역할인지는 서로 모른다. 그저 자기가 정한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맞히면 되는 거다. 나는 우선 심호흡을 하고 다리를 꼬아서 앉은 뒤 긴 목덜미와 어깨선을 쭉 드러낸다. 그리고 덥다는 듯 티셔츠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가슴골을 드러낸다. 그 와중에 걔는 엉거주춤 일어나 멀뚱멀뚱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누구를 표현한 건지 모르겠지만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다소 멍청한 배역인 듯하다. 갑자기 걔가 두 손을 쭉 뻗었다가 목을 감싸쥐며 외친다. “놉!”
나는 그 대사와 발성을 듣고 단번에 눈치를 챈다. “너 설마 호머 심슨이야?”
그럼 그 애가 웃고 연기를 멈춘다. 연기가 아직 덜 끝난 나는 그 애의 옆에 다가가서 가까이 앉는다. 그 애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내 손을 슬쩍 가져다댄다. 처음엔 살살 문지르지만 갈수록 거침없이 만져야 한다. 이 손짓은 천박할수록 좋다. 나는 대사를 치기 위해 입을 연다.
“학생….”
대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애가 눈치를 챈다.
“에 나온 떡볶이집 아줌마?”
게임 한 판이 그렇게 끝난다. 다음 판에서 걔는 의 아귀가 되었고 나는 의 날라가 되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자기 아닌 것’을 하며 놀았다. 그 애는 자기 아닌 것을 연기하기 시작할 때 나보다 훨씬 더 겁이 없었다. 연극배우의 아들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남자애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를 속이지 못한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애인의 정직함은 사랑스러웠지만, 꼭 속여줬으면 하는 일이 연애에는 왕왕 있었다. 그 애가 아는 여자들 중 내가 가장 섹시하다고 속여준다면, 전혀 지루하거나 권태롭지 않다고 속여준다면, 어제 같이 놀았던 그 여자앤 사실 너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라고 속여준다면 나는 기꺼이 속아줄 것이었다. 그러나 정직한 나의 애인은 나를 자주 시무룩하게 했다.
그 애가 나를 잘 못 속일 때마다 나는 팀 로스를 생각했다. 그가 에서 보여준 만큼의 초인적인 실력을 만약 내 애인이 발휘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남은 생과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서 그 애를 사랑할 셈이었다. 아무것도 속이지 않는 연애가 얼마나 쓸쓸한지 그 애가 알았으면 했다. 우리는 종종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왜곡하는 동안 더 나은 인간이 되기도 한다는 걸 그 애가 믿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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