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연애가 끝나서 자꾸 눈물이 났던 작년 어느 날에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누나, 슬플 땐 많이 걸어. 그럼 길 여기저기에 슬픔을 두고 올 수 있거든.나는 원래 많이 걷는 사람이었지만 그날 이후 더 많이 걸었다. 많이 슬픈 날엔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매일 달리기를 하...2016-07-21 18:42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이십 몇 년 전 엄마의 화장대 거울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모서리에 스카치테이프를 무척 조심스러운 모양으로 붙인 걸 보면 엄마는 그 사진을 아끼는 것 같았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화장대보다 키가 작았으며 사진 속 여자를 알지 못했다. 엄마는 닮고 싶은 사람의 얼...2016-06-24 17:18
괜찮아 거기는 무사해아빠가 환자복 입은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환자복이 하얘서 아빠는 평소보다 더 까매 보였고 그 옆엔 엄마가 때꾼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심란해서 밤새 잠을 설친 다음에도 충분히 화장하고 호피무늬 블라우스와 에이치라인 스커트를 입은 채로 남편과 병원에 오는 엄마의 ...2016-05-29 08:58
차인 날의 목욕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아끼던 입욕제도 풀어 넣었다. 좋아하던 머스마한테 방금 차인 여자애가 내 방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그 여자애한테 늘 시큰둥했다. 걔는 화장도 너무 진하고 말도 너무 많아서 같이 있다보면 내 눈과 귀가 피곤해졌기 때문이...2016-05-01 03:53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애플리케이션(앱)을 하나 깔았다가 며칠 만에 지웠다. ‘에스크에프엠’(askfm)이라는 앱이었다. 이름에서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질문을 주고받는 Q&A 중심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였다. 흥미로운 건 질문자가 대부분 익명으로 처리된다는 점이었다. 누가 내게 물어봤는...2016-03-31 19:16
화장을 지우는 여자자려고 누운 새벽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화장을 잘하는 여자애가 보낸 것이었다. 화장을 한 얼굴과 지운 얼굴의 갭이 가장 큰 애이기도 했다. 메일의 제목은 ‘도움 요청’. 첫 문장은 이러했다.“갑자기 이런 글을 읽게 될 네 기분도 구리겠지만 ...2016-03-02 17:14
엄마, 아빠, 이불, 알람 부부는 아직 이불 속에 있다. 잠이 너무 달아서 일어나기 싫은 거다. 이불을 벗어나면 춥겠지. 서둘러 씻고 옷 입고 부지런히 일하러 가야겠지. 너무 바빠서 어쩌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을 거야. 어제만큼 고되겠지.첫 번째 알람이 울렸다가 꺼진다. 다음 알람은 5분 뒤에 ...2016-01-20 23:22
한결같이 한심해서 사랑한다과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좋다. 그렇게나 웃긴 시리즈물과 함께 자랄 수 있다니 말이다. 1989년 첫 회를 방영한 시리즈는 지금까지 27개 시즌을 내놓으며 이어져왔다. 내 나이가 심슨 부부와 비슷해질 때까지 시리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1990년대 초반에는 구형...2015-12-24 20:38
가끔은 나를 속여줘누군가를 속이는 일에 아주 탁월했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미스터 오렌지가 그랬다. 타란티노의 데뷔작 에서 미스터 오렌지를 연기한 팀 로스 말이다. 그는 마약을 팔아본 적도 없으면서 마약을 팔다가 경찰에게 잡힐 뻔한 썰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외우고 또 외운다. ...2015-11-12 20:47
헤어져 슬픈 와중에도 고기는 맛있구나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유식으로 고깃국을 먹이곤 했다. 쇠고기뭇국, 닭곰탕, 보신탕, 내장탕, 삼계탕, 사골국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핵심은 어린 내가 잘 씹을 수 있도록 그가 잘게 잘라놓은 고기의 크기였다. 할아버지는 찐득찐득할 만큼 진하게 우려낸 고기 국물에 밥을 만 뒤...2015-10-24 14:12
호빗은 간절히 청했다지 “노래를 해보시오!”초등학생들의 잘못 쓴 맞춤법에 나는 종종 감동을 받곤 한다. 그들의 잦은 실수 중 하나는 ‘우리 엄마·아빤 연예를 8년 하고 결혼했다’라고 쓰는 것이다. 연애와 연예를 헷갈려하는 그들을 위해 나는 공책에 파란색 색연필로 바른 맞춤법을 적어준다. 그러나 ‘나는 커서 연애...2015-09-23 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