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유식으로 고깃국을 먹이곤 했다. 쇠고기뭇국, 닭곰탕, 보신탕, 내장탕, 삼계탕, 사골국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핵심은 어린 내가 잘 씹을 수 있도록 그가 잘게 잘라놓은 고기의 크기였다. 할아버지는 찐득찐득할 만큼 진하게 우려낸 고기 국물에 밥을 만 뒤 한 숟갈 푹 뜨고는 그 위에 작은 고기 조각을 올려놓았다. 혹시 내 입천장이 뜨거울까봐 그것을 후후 불어 식히던 할아버지의 입 모양을 기억한다. 고깃국을 먹으며 유아기를 보낸 나는 누가 사랑이 뭐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 입 모양부터 생각이 난다.
그저께 엄마가 부엌에서 고기를 푹 삶은 이유는 내가 실연한 채로 집에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엄마집에 잘 가지 않았다. 내 집에서 연애하느라 바쁜 나머지 엄마집에는 도통 갈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매일같이 진한 고깃국을 끓여먹는 집에서 자란 나는 엄마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챙겨먹으며 지냈다. 나의 풍요로운 냉장고 문을 부지런히 열고 닫으며 남자친구와 함께 먹을 식탁을 차렸다. 그럼 열 달 된 수컷 고양이가 식탁 밑에서 냄새를 맡다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연애가 끝나자 밥을 차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부엌이 금세 적막해졌다. 나는 도망치듯 그 집에서 나와 기차를 타고 엄마집에 갔다. 엄마는 이럴 땐 남의 살을 먹고 힘내야 한다며 잘 삶아진 고깃덩어리를 두툼하게 썰었다. 축 처진 어깨로 엄마 앞에 앉아 수육을 한 점 집어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내가 먹는 걸 지켜보기만 하던 엄마는 내 맘을 아프게 한 사람은 다 나쁜 놈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귀한 집 딸인데 누가 우리 딸을 속상하게 하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목이 메어서 고기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입을 열어 엄마에게 따졌다.
“하지만 엄마, 걔도 얼마나 귀한 집 아들인데….”
나는 그렇게 말해놓고 엉엉 울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엄마는 그 애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 모를 것 같아 울었다. 그렇게 멋진 놈도 연애를 와장창 망쳐놓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가 얼마나 유일무이한지 알아서 울었다. 바닥에 놓인 엄마의 코트 소매를 집어들어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내가 울음을 그치자 엄마는 세상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다고 말했다. 이제는 더 좋은 유일무이를 찾아보라고도 했다. 엄마 말을 듣고 고기 한 접시를 다 비웠다. 헤어져서 슬픈 와중에도 고기가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자 나는 헤어진 그 애와 나를 위해 너무나 밥을 차리고 싶어졌다. 마트에서 앞다리살이랑 새송이버섯이랑 숙주랑 청양고추를 사와서 불맛 나게 휘리릭 볶고 우렁강된장찌개를 자박자박 끓이고 호박잎을 데쳐서 식탁 위에 올리고 싶었다. 우리 이 밥을 나눠먹고 힘내서 잘 헤어져보자고 얘기하고 싶었다. 이 연애를 하는 동안 네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심하게 반했는지도 꼭 다시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저히 밥만 먹고 헤어질 자신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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