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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이 한심해서 사랑한다

호머를 평생 다시 알아보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심슨 가족>의 마지처럼
등록 2015-12-24 20:38 수정 2020-05-03 04:28

과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좋다. 그렇게나 웃긴 시리즈물과 함께 자랄 수 있다니 말이다. 1989년 첫 회를 방영한 시리즈는 지금까지 27개 시즌을 내놓으며 이어져왔다. 내 나이가 심슨 부부와 비슷해질 때까지 시리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1990년대 초반에는 구형 TV를 보며 낄낄대거나 오래된 집전화기로 장난전화를 걸던 캐릭터들이 이제는 나처럼 아이폰을 쓰고 페이스북에 수시로 접속한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에는 페이스북에서 연애 및 결혼 상태를 ‘복잡한 관계’로 변경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미디어 환경이 격변하고 몇 번의 대통령이 바뀌는 와중에도 속 인물들은 대단히 한결같다. 30년 가까이 시즌이 거듭되는 동안 거의 아무도 성장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소 직원인 호머 심슨은 매일 도넛을 먹으며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발전소의 사장인 번즈는 아직도 호머가 누구인지 모르며, 바트 심슨은 술집 사장 모에게 유치한 장난전화를 매일 걸지만 놀랍게도 모는 매번 속아넘어간다. 그들은 항상 우습고 반복적으로 어리석다. 이것은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약속이기도 하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웬만해선 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슨 가족은 지극히 시트콤다운 만화다.

애인이 한심해서 화가 날 때면 나는 필사적으로 노트북을 열고 시리즈를 재생시킨다. 심난한 순간에 한국 드라마를 재생시키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자 배우들이 내 남자친구보다 잘난 모습만 보여주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모자란 구석이 있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성장해 마지막 회에서는 대부분 첫 회 때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 되어 있다. 드라마 대신 을 보고 싶은 건 그래서다. 애인이 아무리 한심해도 호머 심슨만큼 반복적으로 한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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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은 내가 소주를 2병만 먹으라고 해도 꼭 3병을 먹고 지나치게 취하지만 호머보다는 낫다. 애인은 친구들이랑 논 뒤에 술값을 꼭 자기가 다 계산하려고 하지만 호머보다는 낫다. 애인은 가끔 내가 울 때 지겹다는 듯이 한숨을 쉬지만 호머보다는 낫다. 나는 매일 밤 호머 심슨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나서 깊은 잠에 들곤 한다. 그렇다면 그런 호머를 사랑하는 부인 마지는 도대체 어떤 여자란 말인가. 여느 때처럼 사고를 한바탕 치고 온 호머를 보고 마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You, how unperfectly perfect you!”

그 문장은 머릿속에서 즉시 ‘당신, 얼마나 안 완벽한 대로 완벽한 당신!’ 정도로 번역된 뒤 내 가슴을 푸욱 찔렀다. 마지가 한 말이 너무 강하고 아름다워서 코끝이 찡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마지의 재능에 대해 생각했다. 마지는 아마도 천재일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다시 알아보고 다시 사랑하는 일에 천재적이다. 이라는 오래된 시리즈의 마담이 되기에 마지는 그래서 충분하다. 시추에이션 코미디의 등장인물들은 특별히 더 튼튼해야 할 것이다. 에피소드마다 수없이 반복되는 난감한 일을 겪으면서도 계속 극 속에 남아야 하니까. 시트콤 주인공만큼의 대단한 면역력으로 연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가 호머를 계속 다시 알아보고 다시 사랑에 빠지듯 나도 다시 하는 걸 잘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럼 연애의 어떤 갈등도 시트콤 에피소드처럼 산뜻하게 마무리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슬아 손바닥문학상 수상자·레진코믹스 만화 ‘숏컷’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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