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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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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 지우는 여자

알바하고 살림하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 20대…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사실이라 고칠 수 없는 장학금 신청서를 쓰다
등록 2016-03-02 17:14 수정 2020-05-03 04:28
이슬아

이슬아

자려고 누운 새벽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화장을 잘하는 여자애가 보낸 것이었다. 화장을 한 얼굴과 지운 얼굴의 갭이 가장 큰 애이기도 했다. 메일의 제목은 ‘도움 요청’. 첫 문장은 이러했다.

“갑자기 이런 글을 읽게 될 네 기분도 구리겠지만 이걸 쓴 내 기분은 어떻겠냐.”

아래에는 문서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열어보니 장학금 신청서였다. 교외 재단에서 지원하는 장학금 사업이었고 집안 사정이 어려운데 성적이 좋은 대학생들에게 한 학기 등록금의 일부를 지원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 애는 신청서 양식을 빼곡히 채워 내게 보냈다. 혹시 틀린 문장이 없는지 봐달라고 했다. 침대에 삐딱하게 누워 노트북을 배 위에 얹은 채 걔가 쓴 장학금 신청서를 열었다. 일곱 페이지였다.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여러 개의 알바를 하고 혼자 살림하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 걔가 언제 이 긴 글을 다 썼는지 궁금했다. 주어진 문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성장 과정과 가정환경 2. 본인의 장단점 3. 장래에 대한 포부 4. 현재 가정의 경제적 상황.

나는 그 신청서를 읽다가 이불로 눈물을 훔치며 울었다. 그 애가 나열한 자신의 사정은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미없을 만큼 지나치게 드라마틱해서 어떤 부분은 조금 덜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다 사실이라 고칠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몇 개의 맞춤법과 비문 정도만을 고친 뒤 걔한테 전화를 걸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우선 “잘 읽었어”라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니 되게 이상했다. 뭘 잘 읽었다는 거야. 재밌었다는 말로 들릴까봐 걱정이 됐다.

친구는 올리브영에서 밤 11시에 퇴근한 뒤 이 신청서를 쓰고 집안일을 하던 중이었다. 10시간 근무 중 식사 시간이 30분인데 식대도 따로 없고 시간도 촉박하니까 집에서 도시락을 싸간댔다. 매장 뒤에 딸린 작은 창고에서 식은 도시락을 먹곤 하는데 오늘은 점장이 그 애한테 앞으로는 도시락 금지령을 내렸다. 창고에 도시락 냄새가 밸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애는 이제 자신이 ‘힙’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자신이 특별히 예쁘거나 멋있거나 인기가 많거나 뭔가를 기막히게 잘하는 사람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름이면 수영장과 각종 페스티벌에 가고 겨울이면 스키장이나 호텔에 가서 친구들과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일 같은 건 가난해서 못하는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통장 잔액과 몸의 고단함부터 생각하는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자기가 화장을 잘하는 실력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밤 되면 박박 지워버릴 화장 그냥 안 하고 다닐까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누군가가 퍼뜩 떠올라서 입을 열었다.

“야, 내 친구남자 중에 걔 있잖아. 밴드 하는 애.”

“응, 걔가 뭐.”

“걔가 너 예쁘대.”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말을 언제 했는데?”

“저번에 너랑 마주쳤을 때 헤어지자마자 나한테 말하던데.”

수화기 너머로 여자애가 치, 하고 웃었다. 우린 다른 얘길 좀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치며 여자애는 얼굴을 깨끗이 씻고 로션도 충분히 바르고 자야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내일 화장이 잘 먹을 테니까. 나보고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통화에서 여자애가 한 것 중 유일하게 산뜻한 말이라서 나는 걔 보고 화장 안 해도 예쁘다고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내일 걔가 맘에 쏙 드는 화장을 하고 알바하러 갔으면 했다.

이슬아 손바닥문학상 수상자·레진코믹스 만화 ‘숏컷’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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