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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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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거기는 무사해

당신의 마취 전후 항문외과에서 보낸 한나절
등록 2016-05-29 08:58 수정 2020-05-03 04:28
이슬아

이슬아

아빠가 환자복 입은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환자복이 하얘서 아빠는 평소보다 더 까매 보였고 그 옆엔 엄마가 때꾼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심란해서 밤새 잠을 설친 다음에도 충분히 화장하고 호피무늬 블라우스와 에이치라인 스커트를 입은 채로 남편과 병원에 오는 엄마의 능숙함이 나는 좋았다.

환자복을 입은 아빠는 병원 로비에 앉아 여러 통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각종 축제와 행사가 잦은 오뉴월은 렌털 일을 하는 아빠에겐 무척 성수기였기 때문이다. 아빠는 민첩하고 꼼꼼하고 빈틈없게 일해왔다. 아빠의 치질이 수술해야 할 만큼 악화된 것은 그런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출근하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병원을 떠나자 로비엔 나와 아빠만이 남았다. 아빠는 나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자신이 수술실에 있는 동안 렌털 문의 전화가 왔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조리 있게 일러주었다.

아빠가 무언가를 설명할 때의 말투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빠는 이야기의 강약과 디테일을 챙기는 데 능했으며 상대가 잊어버릴 수 없게끔 효과적인 순서로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엄마와 나는 그 점을 높이 사는 동시에 지겨워하기도 했다.

복도 어디에선가 간호사가 아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스마트폰을 넘기고 간호사를 따라갔다. 나는 아빠 이름이 적힌 병실 침대에 벌러덩 누워보았다. 아빠가 이 시간에 일을 안 하고 있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주변 침대에는 비슷한 병으로 고생하는 할아버지들이 누워 계셨고 모두 혈색이 좋지 않으셨다. 아빠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몇 개의 렌털 문의 전화를 받고 메모를 했다.

30분 뒤 남자 간호사가 아빠를 눕힌 바퀴침대를 밀며 나타났다. 나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고 아빠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감고 있었고 얼굴이 까맸고 아직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너무나 슬퍼졌다. 나는 약간 목멘 소리로 간호사에게 아빠는 언제 깨어나느냐고 물었다. 간호사가 대답했다. 이미 깨어 계시는데요. 그 순간 아빠가 시치미를 떼듯 눈을 딱 떴다.

간호사는 바퀴침대를 병실침대 옆에 바짝 대더니 아빠보고 슬슬 넘어가시라고 시켰다. 아빠는 누운 채 뭉그적뭉그적 움직여서 병실침대로 몸을 옮겼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마취가 덜 풀려 아직 감각이 없었으므로 간호사와 내가 들어줘야 했다.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다. 아빠의 다리를 이루고 있는 살과 뼈와 근육의 양을 대략 알 것 같았다.

간호사가 떠나고 나는 아빠 어깨와 이마를 쓰다듬으며 괜찮은지 물었다. 마취 기운 때문에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아빠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자꾸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하반신이 무사히 있는지를 확인하며 발을 주물러보라고 시켰다. 나는 아주 세게 주물렀지만 아빠는 아무 느낌이 없댔다. 그게 너무 갑갑하고 안 좋은 느낌이랬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고추가 없는 느낌이야….”

나도 모르게 “×발 어떡하냐…”라고 말해버렸다. 아빠는 흰 환자복 사이로 손을 넣고는 만져보아도 꼭 남의 살을 만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마취에서 깨어난 직후 엄마들은 대체로 자신의 아이부터 걱정하고 아빠들은 대체로 자기 고추부터 만져본다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빠에게 아빠 자식도 아빠 고추도 둘 다 무사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아빠는 곧 잠이 들었다.

늦은 저녁 퇴근한 엄마가 병실에 도착했을 땐 아빠의 하반신 감각이 모두 돌아오고 난 뒤였다. 엄마는 짓궂은 표정으로 아주 빠르게 아빠의 두 번째 발가락을 꼬집었다. 아빠가 아야, 라고 했던 것 같다. 그 장면은 내게 엄청난 안심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걸음으로 항문외과 병동을 떠나 데이트하러 갔다.

이슬아 손바닥문학상 수상자·레진코믹스 만화 ‘숏컷’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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